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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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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재단: 바스키아 × 워홀. 네 손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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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dation Louis Vuitton : Basquiat × Warhol, À Quatre Mains


2023년 4월 5일부터 2023년 8월 28일까지



2018년 루이비통 재단은 « 장 미셸 바스키아 » 전시회를 선보였는데, 이때 거의 70만 명의 방문객을 기록,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원에 힘입어 2023년 4월 5일부터 8월 28일까지 재단은 장 미셸 바스키아의 작업을 계속 탐구하며 이번에는 특히 앤디 워홀과의 협업을 공개한다. 이 전시회는 바스키아와 워홀이 공동 서명한 80점의 그림을 포함, 300점이 넘는 작품과 텍스트를 한자리에 모았다. 이번 전시 포스팅은 나의 친구이자 루이비통 재단에서 일하는 프랑스 공인 가이드 클레르양의 해설이 바탕이 되어 주었으므로  포스팅에 앞서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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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부터 1985년까지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1960-1988)와 앤디 워홀 (Andy Warhol, 1928-1987)은 함께 약 160점의 "네 손 그리기" 캔버스를 제작했는데, 이는 각자의 경력 중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였다. 워홀이 먼저 그림을 그리면 바스키아가 마무리하는 순서로 작품이 완성되었는데, 그들의 작업 막바지에는 순서를 바꾸기도 했다. 한편 바스키아와 워홀의 콜라보 작품의 증인인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그들의 우정을 "단어 대신 그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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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와 워홀의 첫 만남 1시간 30분안에 그린 그림인데 80년대 당시 바스키야는 반짝반짝 빛나는 신예였고 워홀은 이미 60년대부터 유명했는데 이 둘을 동등하게 표현했다. 바스키아는 워홀을 원로이자 미술계의 핵심 인물, 새로운 언어의 창시자, 대중문화와의 독창적인 관계로 존경했다. 한편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미국 예술계 내러티브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삽입한 새로운 스타일과 형식을 가져왔다는데에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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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워홀의 바스키아, 바스키아의 워홀이라는 교차 초상화 시리즈로 시작된다. 워홀이 그려낸 바스키아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처럼 묘사되고 있다.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 표지로 유명한 워홀의 바나나를 오마주하여 바스키아가 워홀을 그려낸 작품이다. 바나나의 머리에 은색 가발과 바나나의 갈색 반점은 워홀의 기미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워홀은 살인 미수의 피해자였기에 가슴 부분에 큰 상처가 남아있어서 항상 긴팔, 긴 바지를 선호했는데 바스키아에게는 특별한 우정의 의미로 그의 흉터를 보여주고 그릴 수 있게 허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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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야는 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이자 흑인의 인권 신장을 위해 흑인 모습을 미술계에 드러내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특히 흑인들이 가장 큰 인정을 받았던 분야인 스포츠, 권투를 굉장히 좋아했기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흑인 권투 선수들은 그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흑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를 동전에 그려 넣으면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아프리카라는 자신의 기원에 대한 오마주를 표하며 카리브해, 아프리카 문화, 노예들 등을 통해 아프리카를 늘 꿈 꿔왔다. 1984년까지 아프리카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상상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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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술가는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클레먼테 (Francesco Clemente)의 참여로 함께 작업을 하여 총 15개의 작품을 만들어 냈는데, 그 15작품들이 모두 이번 전시에 모여 있다. 그들의 끊임없는 열정과 교류의 힘은 워홀의 실크프린트, 바스키아의 페인트, 클레먼테의 수채화처럼 세 예술가가 가장 좋아하는 기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 전시회는 혹평을 받았다. 그림 속 스토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들만 덩그러니 그려져있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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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는 사회적이고 정치적 요소들을 그의 미술에 자주 남겼는데 특히 흑인의 모습을 남기면서 그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그림 속 치아 위에 욕이나 모욕적인 미소는 흑인 노예 역사를 의미한다. 흑인 남자의 치아가  동물처럼 치아를 통해  건강을 확인하기 위한 요소로 쓰였던 점을 포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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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 그림, 미 레이건 대통령의 옆모습, 베트남 전통 모자 '논라'는  84년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중국을 공식 방문했던 정치적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 양국 경제관계에 아주 중요했고 언론에서 내내 화제였기에 그들의 그림에도 계속 등장한다. 베트남 모자를 쓴 흑인 모습을 그렸는데 그 당시 서양사람에게 중국의 이미지는 베트남 모자를 쓰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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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일, 숫자, 가격, 야구 글러브, 신발은 소비사회와 연결되는 소재이다. 소비자들에게 더 많이 가지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이 패턴은 실크 프린트로 끝없이 복제 가능하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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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는 인체해부에 관심 많았기에 두개골이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 입원했을때 엄마가 해부학 서적인 ‘그레이 아나토미’를 선물해줘서 이를 많이 읽고 보며 공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사람의 인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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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와 워홀이 그려낸 프랑스도 볼 수 있었는데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냈다. 미국사람은 프랑스인들을 약간 조롱할 때 '개구리'라고 부르는데, 프랑스 요리 중에 개구리 요리가 있다 보니 생긴 별명이다. 그리고 에펠탑 패턴의 복제로 개구리가 프랑스인을 상징하고 있음을 또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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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술가의 콜라보중 가장 큰 그림인데 넓이가 무려 10미터라고 한다. 회색은 뉴욕의 벽과 그래피티를 보여준다. 젊은 시절 워홀 그래피스트였기에 이 작품에는 스프레이 페인트가 아닌 페인트를 사용했고 바스키아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발자국을 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누가 어느 부분을 그렸는지 확연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데 누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기에 더 특별한 것 같다. 워홀은 가장 좋은 작품은 두 작가의 터치가 구분이 안될 때 탄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이 공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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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은 신발 디자이너이기도 해서 캔버스 화를 많이 그렸고 이 그림을 이어받은 바스키아는 신발과의 연결고리인 발을 그려 넣었다. 특히 Don’t tread (나를 밟지마) 라고 하며 신발이나 발이 뱀을 밟지 않고 있다. 18세기 미국 독립 전쟁 때, 방울뱀을 문장에 새겼는데, 방울뱀은 공격받지 않으면 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종차별적 정당 방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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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아티스트의 개별 작품과 다른 인물(마이클 할스밴드 Michael Halsband, 키스 해링 Keith Haring, 제니 홀저 Jenny Holzer, 케니 샤프 Kenny Scharf...)의 작품 그룹도 전시되어 1980년대 뉴욕 다운타운의 예술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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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85년 토니 샤프라치 갤러리 (Tony Shafrazi Gallery)에서 열렸던 바스키아와 워홀의 전시회 포스터를 위해 마이클 할스밴드가 제작한 권투 글러브 시리즈 사진이 멋있게 펼쳐져 있다. 85년 5월까지 그들의 콜라보는 1년 반동안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전시회 계획 홍보를 위한 권투 선수 컨셉은, 빛나는 신예 바스키아와 팝아트의 제왕 워홀 둘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경직된 예술계와의 싸움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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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스키아는 백인들에게 인정받는 최초의 흑인 예술가가 되었는데, 정작 그들의 전시는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그림을 비판하는 수준 이상으로 전시회 관계자와 기자들이 둘의 관계를 음해했고 이에 상처받은 바스키아는 워홀과 갈라서게 되었다.  그들의 협업 작품 활동은 끝이 났지만 그들은 꾸준히 우정을 나눴고 그 우정을 그림으로 남겨왔다. 그러나 공동 작업을 위한 캔버스였기에 바스키아의 손을 거치지 못한 작품들은 미완성작이라고 평가한다. 문 형태의 묘비가 전시장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는데, 워홀이 87년에 담낭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후, 워홀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하기 위한 하트, 검은색 튤립, 노란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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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의 규모도 굉장히 크고 스토리텔링 또한 아주 흥미로웠던 전시회였다. 게다가 워홀과 바스키아의 세대를  뛰어넘은 우정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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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를 2시간 동안이나 열정적으로 설명해준 클레르양에게 다시 한번 더 감사를 표하며 독자들에게도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시길 추천한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 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텍스트 이미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갤러리자인제노의 파리통신원 및 객원 큐레이터,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 도슨트로 활동 중이며,
문화예술신문-아트앤컬쳐에 에디터로 리뷰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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