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슐리외 국립도서관: 다미앙 드루베 - 이토록 어두운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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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5일부터 2025년 2월 16일까지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 Damien Deroubaix - En un jour si obscur
리슐리외 국립도서관은 오랜 전통과 독창적 건축미를 자랑한다. 희귀 서적, 고문서, 지도, 음악 자료, 판화 및 동전 컬렉션 등 방대한 유산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예술 분야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와 영감을 제공한다. 최근 리노베이션을 통해 현대적인 편의 시설과 전시 공간을 갖추고 예술과 학문을 연결하는 문화적 플랫폼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건물 자체와 내부의 공간미를 즐기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고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는 투어나 방문도 가능하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현재 특별전은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다미앙 드루베(Damien Deroubaix, 1972년생)의 전시인데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현대 사회와 그 문제들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국립도서관이 국가 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다미앙 드루베의 다채롭고 다층적인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있는데 BnF 컬렉션에 소장된 그의 초기 작품들과 뒤러(Albrecht Dürer)에서 고갱(Paul Gauguin)까지 이어지는 판화의 걸작들을 연계하여 선보인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드루베는 자신의 예술 실천 중심에 판화, 회화, 조각을 두고 이를 끊임없이 교차시키며 재창조하는 작가이다. 다미앙 드루베의 작품은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하는 아이코노클라즘과 철학적, 도덕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전달하는 알레고리적 요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는 고전적 상징이나 이미지를 변형하거나 도전하는 방식으로 기존 가치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동시에 작품 속에서 인간 존재와 사회적 문제를 상징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 시절 접한 데스 메탈 음악의 영향으로 강렬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여 음악적 에너지와 고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동시에 그는 미술사와 전통 판화 대가들 그리고 현대 대중문화와 반문화의 영향을 받은 상징적 언어를 활용해 관객과 소통하기도 한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이번 전시에는 70점이 넘는 회화, 판화, 목판화, 조각 작품들이 포함되며 그 중 일부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 이들 작품은 국립 도서관 컬렉션에서 엄선한 판화 걸작들과 함께 배치되어 드루베의 창작 과정과 그 예술 언어의 발전 과정을 소개한다. 전시는 총 세 부분으로 나뉘며 드루베가 권력의 폭력을 직접적이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초기 작업부터 인간의 우주적 위치와 예술가의 역할을 더 깊이 탐구하는 내면적인 성찰까지 보여준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첫 번째 섹션 <묵시록(Apocalypses)>은 드루베 예술의 핵심인 혼합과 인용의 원칙을 나타낸다. 중세 말기 및 르네상스 시대 북유럽 화가들인 한스 발둥 그리엔(Hans Baldung Grien),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와 현대 풍자 만화가인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Jose Guadalupe Posada) 및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의 영향 아래 탄생한 죽음의 형상과 괴물 같은 존재들이 드루베의 판화와 회화 작품들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어두운 분위기와 묵직한 주제를 탐구하며, 종말론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독일 표현주의, 중세 미술, 현대 대중문화(특히 펑크 서브컬처) 의 영향을 받아 창조되며, 강렬하고 도전적인 이미지를 통해 현대 사회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토록 어두운 날에> 라는 전시 제목에서부터 불길하고 묵직한 느낌을 전달하며 그로테스크하고 본능적인 이미지를 통해 충격과 성찰을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두 번째 섹션 <혼돈, 세상의 극장(Chaos, théâtre du monde)> 은 주로 고야(Goya)와 피카소(Picasso)에서 영감을 받은 그래픽 작품들을 다룬다. 고야의 드라마틱한 에칭과 아쿠아틴트, 피카소의 창의적인 판화 기법은 드루베의 작업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는 게르니카와 전쟁의 재앙에서 나타나는 상징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 차용하며 오늘날의 참혹한 현실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2012년 고야의 카프리초스 시리즈와의 대화에서 드루베는 판화 기법을 재탐구하며, 고야의 상징과 자신의 상상력을 결합한 신비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고야의 카프리초스(변덕 Caprichos) 시리즈는 1797-1798년 동안 제작된 80점의 판화로 당시 스페인의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마법, 미신, 부패한 귀족과 교회 등을 주제로 하며 고야는 인간 본성과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마지막 섹션 <허무, 샤먼으로서의 예술가 초상(Vanités, portrait de l’artiste en chaman)> 은 드루베가 최근에 집중하고 있는 유화 작업과 이를 통해 탐구하는 새로운 주제들을 조명한다. 다미앙 드루베의 예술은 초기에는 종이 위에 빠르게 그린 수채화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느린 템포의 유화 작업으로 변했다. 동물의 해골, 절단된 몸, 괴물, 무기와 철조망은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권력의 치명적인 폭력을 상징하는 요소이다.
판화와 회화 간의 새로운 상호작용을 바니타스화의 전형적인 모티프인 꽃, 거품, 조개를 통해 보여준다. 고전 회화 중 하나인 바니타스화는 인간의 유한성과 삶의 무상함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죽음과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는 그림들이다. 이를 통해 드루베는 폭력과 권력의 상징을 바니타스화의 모티프들로 대체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Time goes on' , '문어 접시가 있는 찬장' 작품에 표현하고 있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고갱과 반 고흐의 후기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자화상과 정물화, 색채 실험을 통해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질문한다. 폴 고갱의 유명한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D’où venons-nous ? Que sommes-nous ? Où allons-nous ?)> 의 제목, 구성, 색상, 형식을 문자 그대로 재현하거나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 꽃병을 나무에 판화로 옮기는 작업은 이 유명한 선배 화가들과의 관계를 통해 '화가란 무엇인가 ?'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내가 느낀 다미앙 드루베의 작품은 한마디로 굉장히 어두운 예술이었다.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끝없는 깊이로 빠져드는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힘겹게 숨 쉬는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는 작품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드루베는 단순히 외면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깊은 고통과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존재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판화 작품들은 마치 인간의 절망과 고통을 나무의 결 사이로 새겨 넣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무는 작품 자체의 깊이를 더해 주는 중요한 소재였고 나무의 질감과 결은 인간 존재의 고통과 혼란이 깊이 각인시킨 듯했다. 드루베의 판화 작품을 보고 나니 판화를 단조롭다고 생각한 나의 편견이 완전히 깨졌다. 그의 강렬하고 복잡한 주제들을 담아내는데 판화가 얼마나 적합한 매체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Richelieu, Photo: Han Jisoo
드루베는 단순히 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잔혹함과 무의미함을 묵직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드루베의 작품은 단순히 '어두운 날'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어두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