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 연구소: 자코메티&모란디 - 고요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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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stitut Giacometti : Giacometti & Morandi - moments immobiles
2024년 11월 15일부터 2025년 3월 2일까지
자코메티 연구소는 파리 14구에 위치한 소규모 박물관이자 연구 기관으로, 조각가 겸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삶과 예술 세계를 탐구하고 기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곳은 그의 작품, 창작 과정, 그리고 예술적 유산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인데 전세계적으로 자코메티의 연구와 전시 활동의 중심지라 평가받고 있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연구소는 자코메티의 대표작들과 미공개 작업들을 포함한 작품을 공개한다. 그래서 조각과 회화뿐만 아니라 작업 도구와 스케치 등을 통해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연구소의 가장 특별한 요소 중 하나는 자코메티의 작업실을 정교하게 복원한 공간이다. 실제로 그가 생전 사용했던 가구, 도구, 조각 및 드로잉 등을 재현하여 방문객들에게 그의 창작 환경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자코메티는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스위스 출신의 조각가, 화가, 드로잉 예술가로, 인간 존재와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걷는 사람(L’Homme qui marche)>을 비롯해 극도로 세련되고 길쭉한 인간 형상의 조각들은 현대인의 고독과 실존적 불안을 상징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자코메티는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철학적 사유를 예술로 표현했으며 조각뿐만 아니라 회화와 드로잉에서도 인물의 내면과 현실감을 연구했다. 그의 예술은 단순한 미술적 표현을 넘어 인간과 존재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던지며 현대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사랑받고 있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이번 특별전은 전후 시대를 대표하는 두 예술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조르조 모란디의 작품을 최초로 한자리에 모아 소개한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두 예술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들의 예술적 공통점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낸다. 이들은 작업실에서의 독특한 창작 방식, 익숙한 환경과 모델에 대한 애착, 현실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서 비롯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조르조 모란디(1890-1964)는 이탈리아 화가로 프랑스 인상파와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을 접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10년대 초부터 판화를 제작하고 형이상학적 회화를 시도했으며 192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노베첸토 운동' 에 참여하면서 주목받았다. [노베첸토 (Novecento)는 1920년대 이탈리아에서 전통적 고전주의와 현대적 감각을 융합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한 문화 예술 운동] 그는 일상적인 정물과 풍경을 단순하면서도 시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며 단순함 속에서도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독창성을 보여준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들은 아방가르드를 거치며 고전적 형태를 새롭게 해석했다. 모란디는 정물화와 풍경화에서, 자코메티는 인간 형상에서 그 성과를 드러냈다. 전후 시대 그들은 보편적 인간 조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추상과 구상 사이의 논쟁이 치열하던 시기에도 현실과 연결된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단순히 보이는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본질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두 예술가 모두에게 작업실은 역동적인 공간으로 현실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장소였다. 모란디는 오브제의 윤곽을 종이에 그려 현재 진행 중인 구성을 기억하고 풍경을 구도 잡기 위해 골판지로 만든 뷰파인더를 사용했다. 자코메티는 모델이 앉은 의자의 위치를 바닥에 표시하고 자연광이나 단순한 전구 불빛 아래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모란디는 오후에는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드로잉 작업을 했으며 자코메티는 낮에는 모델을 밤에는 기억을 바탕으로 작업했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난 자코메티는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인상주의와 야수파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으며 탄탄한 미술사 지식을 쌓았다. 반면 모란디는 서적과 잡지를 통해 프랑스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키웠으며 특히 세잔, 모네, 세잔, 샤르댕, 피카소, 루소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24세에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언어를 습득하여 1914년부터 1916년 사이 초기 정물화에서 이를 표현했다. 자코메티는 1920년대 초 파리에 도착하면서 이러한 예술 언어를 접했고 초기 개인 실험에 큰 영향을 받았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모란디와 자코메티는 공통적으로 조토(Giotto), 렘브란트(Rembrandt), 세잔(Cézanne) 이 세 명의 예술가를 주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특히 폴 세잔의 치열한 작업 방식은 인상주의의 순간적인 색채 효과에서 벗어나려는 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실험적인 영감을 제공했다고 한다. 자코메티는 안드레 로트(André Lhote)의 저서 <폴 세잔(Paul Cézanne)>에 그림을 그려 넣거나, 세잔 작품을 참고하여 스케치를 만드는 등 세잔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두 사람 모두 세잔을 모델로 삼아 현실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1918년에서 1920년 사이 모란디 그림에서는 나무로 깎은 문진, 막대기, 나무 상자와 같은 일상적이고 낡은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이 오브제들은 부드럽고 섬세한 색조로 그려져 공간의 깊이가 축소된 가운데 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공간 속에 배치되어 마치 고요함을 준다. 단순한 형태를 기반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단순히 나열된 오브제를 그린 정물화가 시작된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모란디의 사실적인 표현과 절제된 색조는 이탈리아 예술 운동 노베첸토와 연관되어 이탈리아적 정신을 나타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작품들은 프랑스의 장 콕토가 1926년 <질서로의 복귀(rappel à l’ordre)> 라고 표현했던 당시 시대정신을 반영하기도 했다. 이후 모란디는 병, 꽃병, 방울 같은 익숙한 오브제들을 중심으로 약 30년 계속했다. 이 오브제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며 끝없는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평온하면서도 위협적인 세계를 형성했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모란디는 "저에게 추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실만큼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 « Pour moi, il n’y a rien d’abstrait ; il n’y a rien de plus surréel, et rien de plus abstrait que le réel »)" 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요소들 (병, 상자, 그릇)을 관찰하는 행위가 끝없이 재조명되고 재해석되는 예술적 탐구를 의미한다. 자코메티에게는 여성, 남성 혹은 머리를 바라보는 행위가 그러했던 것이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개인적으로 자코메티 연구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이미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 아르데코 양식으로 세워진 건물은 그 자체로도 작품이다. 자코메티의 예술적 혼과 기운이 깃든 공간은 현대적인 감각과 아늑한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매번 이곳을 찾을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디테일들은 단순한 건축적 장식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을 담아낸 정밀한 설계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이번 전시는 특히 모란디와 자코메티, 두 예술가의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대화를 엿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모란디의 차분한 색채의 조화가 선사하는 세련된 담백함은 자코메티의 정적인 조각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차분함이 오히려 세련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늘 자코메티의 조각들을 볼 때면 조각들이 바닥에 묶인 채 움직일 수 없는 발을 가진 존재 같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끈질긴 생명력과 인간의 의지가 느껴진다.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응시하는 듯한 역설적 에너지가 작품을 가득 채우며 그 고요함 속에 내면의 강렬함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우울한 형태들은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담고 있고 절망 속에서도 살아내려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차갑고 딱딱한 재질로 만들어진 그 조각이 어떻게 삶의 온기를 품을 수 있는지가 독특한 매력이다. 잔잔한 호수 위의 작은 물결처럼 고요함 속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번 전시도 그러했다.
ⓒ L’Institut Giacometti, Photo: Han Jisoo
모란디의 정물들과 자코메티의 조각들이 빚어낸 정갈하고 고요한 기운은 내가 좋아하는 감정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전시를 보는 경험이 아니라 나 자신의 깊은 내면을 비춰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전시장을 나서며 예술은 단순히 감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는 내게 또 다른 고요한 깨달음을 선사했고, 그 깨달음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