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냑-제이 미술관: 아녜스 튀르노에 - Correspondances (상응들) > 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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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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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냑-제이 미술관: 아녜스 튀르노에 - Correspondances (상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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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ée Cognacq-Jay: Agnès Thurnauer - Correspondances
2025년 10월 2일 – 2026년 2월 8일


1929년 개관한 코냑-제이 미술관은 백화점 ‘라 사마리텐’의 창립자 에르네스트 코냑(Ernest Cognacq)과 마리-루이즈 제이(Marie-Louise Jaÿ)가 파리시에 기증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다. 18세기 예술에 특화되어 있으며 회화, 조각, 작센 자기, 금세공품, 명품 가구 등 계몽주의 정신을 반영하는 풍부한 소장품을 갖추고 있다. 마레 지구의 고급 저택을 개조한 공간 안에는 티에폴로(Tiepolo), 샤르댕(Chardin), 외벤(Œben), 클로디옹(Clodion), 구티에르(Gouthière), 그뢰즈(Greuze) 등 당대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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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이번 전시는 아녜스 튀르노에(Agnès Thurnauer)의 회화와 설치 작품을 통해 18세기 미술 속 인물과 장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그녀는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장-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안토니오 카날레토(Antonio Canal) 등과 같은 거장들뿐 아니라, 아델라이드 라비유-기아르(Adélaïde Labille-Guiard),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랭(Louise Élisabeth Vigée Le Brun), 안젤리카 코프만(Angelica Kauffmann)과 같은 상징적인 여성 미술가들, 스탈 부인(Madame de Staël) 그리고 에밀리 뒤 샤틀레(Émilie du Châtelet) 같은 여성 작가·과학자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18세기 예술과 현대적 시각 사이의 대화를 이끈다. 특히 글쓰기를 해방의 도구로 바라보며 계몽주의 미술을 새롭고 생기 넘치는 시각으로 해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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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프랑스-스위스계 작가 아녜스 튀르노에(Agnès Thurnauer, 1962년생)는 1985년 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파리에서 작업하고 있다. 언어를 매개로 인물과 추상, 텍스트와 이미지를 직조하며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펼친다. 그녀의 작품은 서로 연결되는 연작 형태로 구성되며 캔버스 공간을 퍼포먼스적 방식으로 활용해 관객과의 시각적·개념적 대화를 유도한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중첩, 읽기와 보기의 경계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업은 역사적 소재와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과거와 현재, 개인과 사회를 잇는 통로로 기능한다. 프랑스와 해외 여러 미술관과 컬렉션에 소장된 그녀의 작품은 현대 회화에서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재해석하는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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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18세기는 예술과 지적 영역에서 여성의 존재가 인정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비록 루이 14세가 1663년에 “왕립 회화 아카데미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뛰어난 예술가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 입학을 허가받은 여성은 극소수였다. 1720년 로잘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가 입회하며 길을 연 뒤, 여러 여성 예술가들이 왕립 아카데미와 살롱을 통해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들은 18세기 미술계에서 여성의 가시성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 예술가들은 작품을 발표하고 이름을 기록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 살롱은 여성들이 자신의 작품과 사상을 알리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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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이번 전시는 이처럼 중요한 여성 인물들을 아녜스 튀르노에의 현대적 시선 아래 조명한다. 작가의 실물 크기 초상화 연작은 이름표 배지를 확대해 표현하며, 18세기 유명 인물들을 성별을 바꾸어 새롭게 해석한다. 남성의 이름을 여성형으로 바꾸어, 당시 남성 중심으로 기록된 미술사 속 인물을 재구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수아즈 부셰(Françoise Boucher)’는 18세기 프랑스 궁정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를 재해석한 이름이다. 원래 부셰는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았던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으로 활약하며 화려한 궁정 회화와 장식화로 유명하다.  마찬가지로 ‘엠마뉘엘 칸트(Emmanuelle Kant)’는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하며 미와 숭고의 개념을 정리한 철학자로, 튀르노에는 그의 이름을 여성형으로 바꾸어 작품 속에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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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안토니오 카날(Antonio Canal, 카날레토(Canaletto)로 알려짐)은 무대화가였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무대 장치 디자이너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로마에서 네덜란드 풍경화가들과 교류하고 지형적 사실성과 세밀한 묘사 감각을 이어받았다. 그가 그린 베네치아 풍경은 움직이지 않는 거울처럼 잔잔하여 18세기 영국의 수집가들에게 특히 사랑받았다. 아녜스 튀르노에는 짙은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연작으로 그리며, 카날레토가 속한 이탈리아 풍경화 전통의 하늘 기억을 은근하게 불러낸다. 유동적이면서도 사유적인 이 분위기는 고전 회화의 유산과 조용한 대화를 열고, 그 힘을 현재 속에서 되살린다. 작가는 작품에 ‘Now’라는 단어를 결합해, 예술이 무엇보다도 역사적 맥락 이전에 관람자가 직접 체험하는 즉각적 경험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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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2005년부터 이어진 역사화(Peintures d’histoire) 연작에서는 미술사의 명작들을 텍스트와 함께 재구성해 언어를 의미 전달의 도구이자 사유의 매개로 사용한다. 단어와 인물의 관계는 읽기와 보기의 경계를 흔들고 그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주체들’의 내면적 목소리를 드러낸다. 몽유자(Sleepwalker)에서는 작가 자신을 등을 보인 나신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프랑수아 부셰의 오달리스크가 대표하는 에로틱한 여성 이미지와 단절한다. 이는 여성의 신체가 더 이상 대상이 아닌 사유의 주체로 자리하는 전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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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이후 2012년부터 이어진 주형들(Matrices) 연작에서는 석고로 제작된 단편적 글자 조각을 통해 언어의 물질성과 구조를 탐구한다. 언어는 비워지고 해체된 틀로 남아 다시 조합 가능한 조형 형태로 제시된다. 이를 통해 튀르노에는 언어를 사유의 근원적 장치이자 생성 중인 구조로 드러낸다. 프레델라(Prédelles) 연작에서는 언어의 근원적 구조를 탐구하며, ‘Prédelles(제단화 하단)’과 ‘Près d’Elles(그녀들 가까이)’의 언어유희를 통해 역사 속에서 잊힌 여성들에게 헌사를 바친다.  이 시리즈는 기표와 기의의 긴장을 드러내며, 관람자가 언어와 의미의 관계를 스스로 구성해나가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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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의자 연작은 단순한 가구의 차원을 넘어 사유와 존재의 자리이자 예술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작가는 의자에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을 새기거나 회화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누가 앉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남성 중심의 예술사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온 여성 창작자들에게 상징적 ‘자리’를 되돌려주는 행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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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이 연작은 2010년대 초반부터 여러 전시를 통해 선보여졌으며, 튀르노에가 꾸준히 탐구해온 언어·정체성·역사에 대한 사유를 가장 응축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오랑주리 미술관에 설치된 Les Matrices Chromatiques(색채의 모체) 역시 그녀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앉을 수 있는 조각, 즉 기능적 조형물의 형태를 띤 알루미늄 벤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홉 개의 조각이 모여 “chromatiques(색채의)”라는 단어를 형성한다. 작가는 이를 “언어를 앉을 수 있는 조각으로 만든 실험”이라 정의하며 관람자가 그 위에 앉는 행위를 통해 언어와 색, 공간의 관계를 신체적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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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주리 미술관 속 'Les Matrices Chromatiques'  ⓒ Musée CognacqPhoto: Han Jisoo

개인적으로 아녜스 튀르노에의 작업을 처음 접한 건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설치된 의자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때부터 튀르노에르가 언어를 조형적 재료로 다루는 작가라는 점에 관심이 생겼다. 이번 전시는 그런 인상을 더욱 확장시켜 보여준다. 작가는 18세기 미술과 오늘날의 시각을 교차시키며, 예술사 속 여성의 위치와 언어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전시 전반은 회화, 조각, 설치, 텍스트가 서로 맞물리며 구성되어 있는데 특정한 메시지를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관람자가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가게 만든다. 결국 이번 전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예술이었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 문학 학사, 동 대학원에서 문화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마쳤다. 갤러리자인제노에서 파리 통신원 및 객원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도슨트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현재는 문화예술신문 아트앤컬쳐에서 에디터로서 다양한 리뷰를 제공하고, 프리랜서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한인유학생회의 창립멤버이며 프랑스 교민지 파리광장에 문화 및 예술 관련 기사를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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