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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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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자크-루이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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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5일 – 2026년 1월 26일
Musée du Louvre: Jacques-Louis DAVID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미술관으로, 현재 약 50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만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근동·그리스·로마·이슬람 조각, 회화, 장식미술 등 폭넓은 분야를 포괄한다. 특히 모나리자, 사모트라케의 니케, 밀로의 비너스 등 상징적 작품을 보유해 국제적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루브르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연구·보존·교육 기능을 갖춘 국가 기관으로서, 프랑스 문화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유럽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기반으로 활용된다. 또한 대중 접근성을 높이는 전시·프로그램을 운영해 전 세계 관람객에게 문화유산을 공유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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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d8c48d80622a3aaecade09e5eb8e50_1763729104_8346.png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현재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의 대규모 회고전이 진행중이다. 이번 전시는 1825년 브뤼셀에서 망명 중 사망한 그의 200주기를 맞아 마련됐다. 신고전주의의 엄격함 뒤에 숨은 정치적 긴장과 인간적 균열을 다시 들여다보는 기획이다. “프랑스 화단의 아버지”이자 “회화의 재생자”로 불리는 다비드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며 그의 대표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다비드가 여섯 개 의 정치체제를 거치며 혁명과 제국기에 직접 참여한 긴 경력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루브르 소장 <테니스코트의 서약>, 대작의 거대한 단편과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마라의 죽음> 원본 등 약 100점의 주요 작품이 전시된다. 엄격해 보이는 그림 속에 담긴 다비드 회화의 강렬한 표현력과 창조적 힘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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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전세계에서 다비드의 회화와 드로잉을 가장 많이 보유한 루브르만이 이런 기획전시가 가능하다. 지난 30년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 다비드의 예술과 정치가 한 데 얽힌 독특한 여정을 새롭게 정리한다. 다비드는 단순한 시대의 목격자가 아니라, 1748년에서 1825년에 이르는 결정적 국면을 직접 만들어간 주체적 화가였다. 그의 예술적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쳤고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고위급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 대가로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정치적 추방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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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전시는 그가 네 차례나 실패했던 로마상 수상을 다룬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다비드의 초기 여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프라고나르의 밝고 생동감 있는 그림과 푸생의 절제된 엄격함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다. 1770-1773년 아카데미 그랑프리(Grand Prix)에서 연달아 실패했고,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울의 시기가 결국 예술적 경력을 여는 전조가 되었다. 마침내 1774년 그랑프리수상 후, 스승 비앙(Vien)과 함께 로마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는 “고대는 나를 매혹시키지 않는다. 기운이 없고 울림이 없다”고 선언한다. 제도적 규범, 고전적 형식의 요구, 그리고 로마의 고대 미술·옛 거장·동시대 유럽 화가들이 주는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그는 큰 압박을 받는다. 1779년, 또 한 번의 위기가 터졌고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카라바조 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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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다비드의 정치적 참여는 구제도의 자유주의적 인사들과의 교류 속에서 점차 구체화됐다. 헌법군주제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위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는 로베스피에르와와 가까워지며 파리 대표로 선출되었고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공포정치기(1793-1794)에 그는 공교육위원회 위원, 자코뱅 클럽 회장, 공안위원회 위원, 국민공회 의장까지 지내며 혁명 축제와 국장, 판테온 안장식을 조직하고 레펠티에, 마라 등 혁명 순교자들을 그림으로 남긴다. 로베스피에르 몰락 후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고 1794년 투옥, 1795년에는 거주 제한을 받는다. 1799년 이후 그는 나폴레옹 황제의 제1궁정화가로서 <나폴레옹 대관식> 을 통해 권력의 장면을 시각화했다. 부르봉 왕정 복귀 후 브뤼셀로 망명해야 했지만 유럽 각국의 경의를 받으며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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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다비드는 고전적 형식을 바탕으로 시대와 대화하려 한 화가였다. 그는 고대의 언어를 빌려 절대군주 체제에서 시민 사회로 변화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아냈으며 역사화와 초상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고대 영웅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냈다. 단순히 ‘신고전주의 화가’로 규정하기엔 그의 예술적·정치적·사회적 목표가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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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1784년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Le Serment des Horaces)> 는 그의 초기 경력의 정점으로, 유럽 미술계에 큰 충격을 준 혁신적 구성으로 평가된다. 혁명기 기념작 <테니스코트의 서약(Le Serment du Jeu de paume)> 의 경우 역사의 속도는 그림보다 빨랐고 결국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어 그는 혁명을 상징하는 <마라의 죽음(La Mort de Marat)> 을 제작하며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동시대 사건을 결합한 정치적 이미지를 완성했다.<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franchissant les Alpes)> 는 정치적 이미지의 전형으로 자리잡았고, .1799년의 <사비니 여인들의 개입(Les Sabines)> 에서는 내전을 멈추게 하는 여성들의 장면을 통해 화해를 그렸다.  연극적 구성과 몰입형 설치적 배치는 관람자가 작품 속 장면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fad8c48d80622a3aaecade09e5eb8e50_1763729164_7956.png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말년 브뤼셀에서 다비드는 현실주의적 감각과 냉소적 시선을 담은 작품을 제작했지만 그의 예술적·정치적 자유에 대한 신념은 일관되게 유지됐다. 다비드는 루벤스급 규모의 아틀리에를 운영하며 유럽 전역에서 온  화가를 길러냈고 여성에게도 개방하는 등 당시 아카데미 제도에 도전했다. 제자들과 긴장과 경쟁을 거듭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든 다비드는 앵그르(Ingres)같은 제자들이 원칙을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서 미술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비드와 그의 제자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모방과 경쟁, 긴장과 창의적 변화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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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사실 다비드는 전통적 경외심을 강요받는 거대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은 교과서나 광고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우리는 이 그림들을 통해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의 위대한 순간들을 기억하며 그 시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에게 너무 쉽게 붙여온 네오클래식이라는 이름표는 그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차갑게 고정시켰다. 실제 그는 정반대였다. 강한 신념을 지닌 자유로운 화가였고 아카데미즘의 적이었으며 정치적 선택으로 큰 대가를 치렀다. 그의 예술은 새로운 시민 개념이 태동하던 시기에 정치적·도덕적 기획과 맞닿아 있었고 그는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고전주의 형식을 선택한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사회가 겪는 혼란과 폭력에 질서와 형태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fad8c48d80622a3aaecade09e5eb8e50_1763729182_371.png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전시에서는 여러 주제를 통해 오늘날에도 다비드의 예술이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이유를 증명하고 있다. 다비드는 모순과 열망, 에너지로 가득 찬 시대를 작품 속에 담았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는 리얼리즘과 이상주의가 뒤섞인 독특한 합성물이다" 라고도 했다. 이상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과 희망이고, 리얼리즘은 역사라는 현실과의 충돌이다. 위기의 순간에 예술가로서 사회에 참여하고 예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한 그는 오늘날까지  예술가의 사회 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예술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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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ouvrePhoto: Han Jisoo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화커뮤니케이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예술 현장의 숨결을 기록하며 언어와 문화 사이의 미묘한 결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현재는 다양한 문화예술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파리의 이야기를 수집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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