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립미술관: 원자 시대 – 역사의 시험대에 선 예술가들// 조제프손, 알베르트 외렌의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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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1일 ~ 2025년 2월 9일//2024년 10월 11일 ~ 2025년 2월 16일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 L'Âge atomique - Les artistes à l'épreuve de l'histoire // Josephsohn vu par Albert Oehlen
파리 16구에 위치한 시립 현대미술관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설립되었다. 20세기와 21세기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조명하며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이브 클라인 등 거장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15,000점 이상의 회화, 조각, 사진, 영상 작품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다. 세느강과 트로카데로 근처라 파리의 도시 풍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이번 특별전에서는 원자라는 과학적 발견을 통해 20세기 근대사를 재조명한다. 특히 핵폭탄의 개발과 그 파괴적인 결과로 인해 인류의 운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예술적 표현을 통해 알아본다. 약 250점에 달하는 작품들(회화, 드로잉, 사진, 비디오, 설치작품) 과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문서들을 모은데다 프랑스 공공기관 최초로 과학적 발전에 대해 예술가들이 제기한 다양한 입장을 다루고 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20세기 초 원자의 구성과 방사능에 대한 과학적 발견은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존 물리학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던 원자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우리가 바라보던 자연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 방식과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해석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그 동안 합리적, 이성적이라 여겼던 관점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바실리 칸딘스키(Vassily Kandinsky)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가 추구한 신비한 세계를 표현하는 추상예술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중시한 아이디어와 비감각적 현상들에 영감을 받은 개념미술이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핵폭탄은 원자 시대의 출발점이자 현대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서구의 예술가들은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어떤 예술가들은 미학적 중립성과 물리학이 드러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매혹을 표현하는가 하면, 다른 예술가들은 폭발의 순간을 극적인 연출로 표현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인간의 비극을 그려내기도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개리 힐(Gary Hill),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아스거 요른(Asger Jorn), 이브 클랭(Yves Klein), 라슬로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시그마 폴케(Sigmar Polke),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토마스 슈테(Thomas Schütte) 등 20세기 후반의 주요 예술가들이 파괴적인 원자 기술을 예술적 주제로 삼았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전쟁 후 원자폭탄의 거대한 버섯 구름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전쟁과 통신 매체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 폭발 장면은 전쟁의 규모와 그 정보가 빠르게 세계 각지로 퍼지는 상황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1950~1960년대에 들어서 원자폭탄의 이러한 이미지는 대중 문화를 통해 퍼지면서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과 과학기술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의 확장을 반영했다. 한편 공산주의 진영은 핵무기 우위를 주장하며 선전 캠페인을 벌였고 일본에서는 현실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에서 나타난 표현들이 미국의 식민주의와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반예술'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미국의 식민주의와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비판한 당시 일본 사회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예술적 저항이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1970년대부터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참여가 등장했다. 생태학적 인식과 결합되어 핵에너지가 인류에 미치는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 것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 비극의 주체로만 그려지지 않으며 체르노빌 사고(1986년) 이후 생명체 전체가 핵심적인 예술적 주제로 부각되었다. 평화주의자, 반핵 운동가, 반문화 운동가들은 핵 무기 생산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제기했다. 또한 당시 등장한 페미니즘이나 반식민주의와 같은 정치적 움직임과도 맥락을 같이하며 현대 미술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기도 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토마스 슈테의 블라우어 벙커(Blauer Bunker)는 독일어로 "파란 벙커"라는 뜻으로, 슈테 특유의 임시적이고 실험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주황색 배경그림과 파란 벙커, 이를 받치는 임시적인 나무 구조물의 대비를 통해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주며, 동시에 접근 불가능한 입구와 불완전한 구조로 완벽함과 불안정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단순한 모형이 아니라 건축과 조각의 경계에서 현대 예술의 역할과 제도적 의미를 질문하는 실험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슈테의 이런 스타일을 처음 접했지만 기존 조각 작품들과는 다른 자유롭고 독창적인 접근이 매우 새롭고 매력적이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과학적 이론이 초석이 되어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역사적 서사가 더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추상화와 초현실주의, 설치미술과 건축 모형까지 다양한 매체와 스타일을 통해, 예술가들은 원자 시대가 인간성과 문명에 던진 질문들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 과학, 역사, 예술이 서로 맞물리며 만들어낸 거대한 퍼즐을 풀어가는 듯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그야말로 지적 사유와 예술적 영감이 금상첨화였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이번 전시는 단순히 원자의 발견과 핵폭탄 개발이라는 과학적, 역사적 맥락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적 맥락과 당대 예술가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현실을 반영했는지를 다각도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적인 자극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아주 흥미로운 전시였다.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이고도 비극적인 발견 중 하나인 원자와 그로 인한 변화들을 예술의 언어로 풀어내며 과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이야기가 얼마나 깊이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전시였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이번 전시의 도록에는 철학자, 미술 및 건축사학자, 과학사학자 등 전문가들의 수많은 에세이가 담겨 있었는데 예술,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주제를 탐구한다. 또한 현대 예술가와 작가들의 목소리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문서와 이미지를 모았다.
이러한 연관성을 깊이 탐구하는 작품 중 하나가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가 쓴 이 소설이자 영화 대본은 1959년에 발표된 후 알랭 레네(Alain Resnais)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설과 영화 모두 전후의 상처와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여파, 그리고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프랑스 여배우와 일본 남성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전후의 세계에서 인간 존재와 감정의 복잡성을 깊이 있게 다루는데, 늘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구매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이 전시를 감상한 후, 동시에 진행 중인 <조제프손, 알베르트 외렌의 시선으로> 전시로 발길을 옮겼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스위스 조각가 한스 조제프손(Hans Josephsohn 1920-2012)에 대한 회고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독일 회화의 1980년대 혁신에 기여한 중요한 예술가인 알베르트 외렌(Albert Oehlen 1954년생)이 예술 감독을 맡아 조제프손의 작품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알베르트 외렌은 2009년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한스 조제프손의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 알베르트 외렌은 자신만의 연구와 조제프손의 창작 과정, 즉 재료와의 대화, 몸짓의 경험, 세부 묘사와 끊임없는 탐구를 연결 지으며 조각에 대한 생생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한스 조제프손의 작품은 역사적 고난과 개인적인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강렬함을 지닌다. 1920년, 독일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며 나치즘의 박해를 목격했다. 이 경험은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조각에 대한 열정을 지닌 그는 출신 배경 때문에 미술학교 입학을 거부당하고 1938년 플로렌스에서 장학금을 받았으나 인종법 시행으로 급히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고 한다. 스위스 취리히에 정착해 20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며 작업을 계속했다. 전쟁 중 난민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지만 조각은 그의 삶의 중심이었고 1943년 첫 작업실을 열고 지속적으로 창작을 이어갔다. 2000년대 들어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2002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해외 회고전을 개최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조제프손은 주로 여성의 형상을 중심으로 작업하며 머리, 흉상, 서 있는 인물, 앉아 있는 인물, 누운 인물 등의 대형 조각을 제작했다. 또한 다양한 규모의 부조를 모델링했으며 이 부조들은 건축적 요소와 결합된 서사적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다. 이러한 부조들은 조제프손이 특히 사랑한 로마네스크 조각의 풍부함을 연상케 한다. 그는 현실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의 조각은 존재의 본질과 순간의 강렬함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작품에서 형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1950년대 한스 조제프손의 초기 작업은 형태의 정제와 기하학화가 특징이었다. 추상 예술이 아방가르드를 지배하던 시기에 그는 고대 이집트 예술의 상징적이고 강렬한 형상성을 고수했다. 이러한 형상성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과도 연관된다고 한다. 1960년대에 조제프손의 조각은 더 무거워지고 인체의 구현을 중시하게 되었고 다양한 재료 탐구로 확장되었다. 그는 아리스티드 마욜에 대한 존경을 표했으나 그의 작품은 표면 처리, 모델링의 표현력, 그리고 특정한 정적 감정으로 차별화되었다. 1980년대에 한스 조제프손은 점점 더 추상화된 조형 언어를 발전시켰다. 그는 머리, 흉상, 누운 인물들을 더 큰 규모로 제작하며 형상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조형의 장을 열었다. 이러한 변화는 선사 시대의 비너스와 비슷한 원시적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전시의 마지막에는 독일 화가의 컬렉션에서 나온 영국 출신 작가 레베카 워렌(Rebecca Warren 1965년생)의 토템형 조각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조각은 여성 신체 표현에 있어 조제프손의 작품과 형식적 유사성을 보여준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한스 조제프손의 작품들 속에서 나는 거칠고 때로는 원시적인 에너지를 느꼈지만, 그 안에서의 정제된 섬세함이나 감동적인 디테일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의 조각들은 그 자체로 강렬했고 거친 형태를 지녔는데 섬세한 터치와 그 미세한 손길 속에서 감탄을 하며 조각을 감상하는 나의 방식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Photo: Han Jisoo
작품을 해석하려는 어떤 이야기나 내러티브에 얽매이지 않고 조제프손의 창작 과정 자체에 집중해야했다. 그의 작품은 어떤 기교나 섬세함보다 그의 삶과 창작의 과정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힘과 격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낸 조각들이 나에게 완전히 다가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조제프손이 추구한 조각이 온전히 와닿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어쩌면 그 순간 마저 더 큰 이해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