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미술관: 술라주, 또 하나의 빛. 종이 위의 회화 > 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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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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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미술관: 술라주, 또 하나의 빛. 종이 위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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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7일 – 2026년 1월 11일
Musée du Luxembourg: Soulages, une autre lumière. Peintures sur papier 


룩셈부르크 미술관은 룩셈부르크 공원 옆에 자리해있는데 1818년에 문을 열어 오늘날까지 약 20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개관 당시에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여 새로운 예술을 알리는 역할을 했고 지금은 상설 컬렉션을 보유하지 않고 매년 2회 기획되는 대규모 특별전 중심으로 운영된다. 고전에서 현대까지, 그리고 사회적 맥락 속의 예술까지 폭넓게 조망하는 전시를 담고 있다. 올 가을에는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1919–2022)의 종이 작업에 주목한 전시가 진행된다.술라주는 캔버스 뿐만 아니라 종이를 또 하나의 회화적 장으로 삼았으며, 이번 전시는 그의 전체 작업 중 종이에 집중한 별도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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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피에르 술라주는 평생에 걸쳐 2000년대 초반까지 방대한 종이 작업을 남겼으며, 그의 본격적인 실험은 사실 캔버스가 아니라 종이에서 시작되었다. 1946년 그는 집수리용 굵은 붓과 호두껍질 염료(brou de noix)를 사용해 종이 위에 강렬하면서도 넓고 힘 있는 흔적을 남겼다. 검은색이지만 염료 특유의 투명성과 종이 바탕의 흰색이 어우러지며 빛이 스며드는 효과가 나타났고 이는 훗날 그의 핵심 주제인 ‘빛과 검정의 공존’을 예고했다. 술라주는 자신이 사용하는 다양한 매체나 기법 사이에 위계를 두기를 거부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종이 위의 회화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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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술라주의 종이 작품은 오랫동안 작가가 직접 소장하며 캔버스 작업보다 덜 공개되었고, 독립된 전시로 모아 소개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 전시는 194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제작된 130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그중 25점은 최초 공개작이다. 그는 물질의 투명성과 빛의 효과를 중시했으며, 이후 호두나무 염료에서 잉크와 구아슈까지 사용해 수묵화처럼 흰 종이 위를 검정과 갈색의 굵직한 선과 면으로 밝혀냈다. 종이에 남긴 그의 회화는 내밀하면서도 결정적인 실험이자 술라주 회화 언어의 핵심을 드러낸다. 1979년부터 그는 ‘울트라 블랙(Outrenoir)’이라 불리는 새로운 회화 세계로 나아갔다. 빛이 검은색 표면에서 반사되며 변주된 색으로 드러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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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피에르 술라주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프랑스 비구상 회화의 선두에 선 작가로, 1948–1949년 독일에서 열린 프랑스 추상회화전을 통해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과 해외에서 이어진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명성을 확립했으며, 그의 작품은 루브르를 비롯해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며 확산되었다. 술라주의 작업은 1700점이 넘는 캔버스 유화뿐 아니라 약 800점의 종이 작품을 포함해 방대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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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특히 2014년, 그의 고향 로데(Rodez)에 그의 이름을 딴 술라주 미술관(Musée Soulages)이 개관하면서 생전에 직접 기여한 첫 번째 미술관이 탄생했다. 이어 2019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루브르 살롱 카레에서 특별 회고전이 열렸고, 2022년 술라주는 10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프랑스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 추모식을 끝으로 그의 예술 여정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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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술라주의 따뜻하면서도 어두운 색조는 종이 위에서 투명함과 불투명함을 오가며, 마치 빛과 공간이 생겨나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의 거침없는 선들이 서로 맞닿고 겹치며 나타났는데 한자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형상이 마치 새로운 언어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보면 무언가 구체적인 사건이나 장면이 떠오르기보다는 화면 전체에 살아 있는 흐름이 느껴진다. 검은 선과 면이 단순히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부딪히고 이어지면서 일종의 움직임을 체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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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우리가 잘 아는 ‘검은색의 화가’라는 별명이 술라주에게 붙은 것은 1979년부터이다. 울트라 블랙이라 부르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인데 캔버스를 온통 검정으로 덮고, 표면의 질감과 도구에 따라 빛이 다르게 반사되도록 한 것이다. 이 작업들은 같은 해 퐁피두센터에서 처음 공개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종이 작업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몇몇 해에는 대형 흑연 드로잉이나 먹, 혹은 다시 호두나무 염료를 사용한 실험을 이어갔다. 2004년 이후로는 종이 작업을 완전히 멈추고, 오직 울트라 블랙 회화에만 몰두했다. 이 여정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술라주는 “나는 검정의 권위를 좋아한다. 그것의 무게감, 자명함, 그리고 과감함 말이다. 검정은 모든 색에 강렬한 존재감을 부여하고, 심지어 가장 어두운 색조조차도 장엄하게 만든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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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개인적으로 2019년 루브르에서 열렸던 술라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대규모 회고전을 굉장히 좋아했다. 루브르가 생존 작가에게 이런 형식의 전시를 마련한 것은 샤갈과 피카소 이후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도 했고 당시 전시는 1946년부터 시작된 술라주의 예술 세계를 연대기적으로 조망하며 그의 대표작인 울트라 블랙 연작은 물론 대형 회화까지 폭넓게 아우르고 있었다. 그 자체로 술라주의 장구한 경력과 예술적 탐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술라주의 작품을 보면 검은색은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든 색을 끌어들이는 문이었고, 종이는 그 문을 열어 빛을 머금는 또 다른 세계라는 감상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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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ée du LuxembourgPhoto: Han Jisoo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검은색의 회화가 아니라 종이에 집중한 작업들이었다. 100년의 세월을 살아온 화가가 끊임없이 새로운 매체와 표현을 탐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술라주에게 종이는 단순한 바탕이 아니라 빛과 물감이 서로 스며들며 긴장과 균형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무대였던 것이다. 먹빛이 종이 위로 퍼져나가면서 남기는 흔적, 종이가 흡수하고 머금는 깊이, 그리고 그 위에 번져나가는 투명한 빛의 결이 술라주의 세계를 한층 더 다면적으로 드러냈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 문학 학사, 동 대학원에서 문화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마쳤다. 갤러리자인제노에서 파리 통신원 및 객원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도슨트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현재는 문화예술신문 아트앤컬쳐에서 에디터로서 다양한 리뷰를 제공하고, 프리랜서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한인유학생회의 창립멤버이며 프랑스 교민지 파리광장에 문화 및 예술 관련 기사를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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