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피두 센터: 피카소, 무한을 향한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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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e Pompidou : Picasso. Dessiner à l’infini
2023년 10월 18일~2024년 1월 15일
파블로 피카소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퐁피두 센터가 피카소 미술관과 협력하여 주최한 « 피카소, 무한을 향한 드로잉»는 거의 천1000여 점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다. 피카소의 노트, 드로잉, 판화 작품들을 통해 그의 젊은 시절부터 마지막 노년 시기 까지를 폭넓게 조명한다. 전시장 도면을 살펴보며 시노그래피 (공간을 예술작품화 하는 전시로 전시 컨셉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시각적 경험을 주며 관람객의 적극 참여를 이끌어 내는 기법) 를 읽어볼 수 있는데 언뜻 보아도 굉장한 규모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봉주르 파리에 미술관 측에서 제공한 전시장 도면을 참고자료로 활용해본다.
사실 피카소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잘 알려진 화가이기에 아직도 피카소를 더 발견할 거리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나 퐁피두센터 전시만의 독창성은 대단하다. 연대기적으로 작품을 되돌아보는 고전적인 루트가 아닌, 작가의 작업에서 감정, 선, 드로잉의 장소에 대한 수많은 질문처럼 주제가 서로 이어지는 열린 루트를 제공한다. 딱딱한 직선 경로가 아닌 비선형적으로 제안된 경로는 관람객들이 피카소 창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한다.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드로잉들과 생각의 연장선으로서의 그림들은 관람객의 사고를 확장시켜준다.
피카소는 작업 전반에 걸쳐 실험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전 기간에 했던 작업과 반대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얼굴을 모티브로 한 드로잉을 통해 우리는 표현 수단에 대한 새로운 방식과 탁월한 기술적, 문체적 다양성을 파악할 수 있다. 피카소의 물결치는 선은 장식적 모티프로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전달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목표를 두고 있다.
피카소의 그림, 소묘, 판화에 곡예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곡예사 팔다리의 뒤틀림을 묘사하기 위해 그는 아라베스크를 선호했다. 단순히 필기체 선으로 둘러싸여 있는 몸들은 중력 없이 그 운동량에 사로잡혀 캔버스 속 공간을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피카소가 진정으로 묘사하고 싶은 것은 서커스의 불빛보다는 무대 뒤의 가난, 소외, 방황이다. 이 점에서 그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샤를 보들레르와 폴 베를렌의 시적 계보를 잇기도 한다.
붉은 누드는 1906년 말부터 1907년 여름 사이에 다양한 형식의 노트에 스케치를 많이 했는데, 이를 통해 아비뇽의 여인들의 구성이 점차 구체화되었다. 시인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은 « 그는 캔버스를 뒤집고 붓을 버렸습니다. 수많은 낮과 밤 동안 그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고 콘크리트를 본질적인 것으로 축소하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 라고 묘사한다. 빨간색 수채화로 그린 대형 여성 누드는 이러한 강렬한 작업 단계를 알리는 최초의 작품 중 하나이고 마치 내면의 꿈에 빠져있는 것처럼 한 그림에서 다른 그림으로 반복되는 자극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마네의 « 풀밭위의 점심 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를 바탕으로 한 첫 번째 드로잉 시리즈가 1954년에 제작되었고, 이어서 1959년에 또 다른 드로잉 시리즈가 제작되었다. 원작 이미지의 에로틱함은 재해석될 때마다 진지하거나 장난기 있게 다르게 표현된다.
입체파의 대표 작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는 인조 나무 패턴이 있는 벽지를 목탄 그림에 통합하면서 종이 콜라주를 발명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피카소는 시각적 질감만큼이나 텍스트에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색종이, 패턴이 있는 벽지, 악보, 신문을 시트에 붙이는 콜라주 기술을 재빠르게 받아들이며 창조하는 그림과 부조 구조물 사이의 제3의 통로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이후 콜라주 기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조형적 창의성에 대한 애정은 아끼지 않는다.
피카소는 계속해서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넓혔다. 일부 그림은 의도적으로 불완전함을 드러내며 기본 그림을 드러낸다. 채색된 영역과 고전적인 전통 드로잉 방식으로 처리된 영역 사이의 이중성이 정확하고 기교있게 구현되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완성과 완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마무리는 죽음을 의미한다. 드로잉과 페인팅 사이에 그림을 정지시키는 것은 작업이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피카소의 그림 중 상당수는 조각과 상호 작용한다. 1907년부터 피카소는 이베리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예술을 자신의 시각적 레퍼토리에 통합하여 볼륨을 합성하고 이를 나무 조각과 같은 면으로 표현했다.
1935년부터 1950년대까지 피카소는 약 340편의 시를 썼는데, 이 원고들은 거칠거나, 날카롭거나, 화려하거나 매우 다양한 서체를 띄고 있다. 피카소가 기욤 아폴리네르와 초현실주의 예술가 친구 사이라고 알고만 있었지 직접 시를 썼을 줄을 몰랐던 부분이라 좀 새로웠다.
1930년대부터 피카소는 글쓰기와 이미지의 경계에서 자신의 시 몇 편을 판화로 옮겼다. 판화 분야에서도 목판 인쇄, 리노커팅, 심지어 석판 인쇄까지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는데, 피카소가 가장 좋아하는 기술은 금속판에 밑그림을 그려 만드는 에칭 기법이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는 작품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보여주는 접근 방식을 취하며 피카소를 단순한 천재 화가라는 프레임으로 제시하지 않다. 피카소의 창조는 상상력의 배출구와 카타르시스의 극장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