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도서관-리슐리외 : 흑백의 드가 -그림, 판화, 사진
본문
BnF-Richelieu : Degas en noir et blanc-Dessins, estampes, photographies
2023년 5월 31일 - 9월 3일까지
이번 전시는 <봉주르 파리> 의 독자이자 나의 오랜 친구 연꾸양이 추천해 준 만큼 큰 기대를 가지고 갔는데 역시나 굉장히 흥미롭고 신선한 전시였다. 개인적으로도 공부가 많이 되기도 했기에 지면을 통해 연꾸양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진행중인 드가-마네 전시를 본 후라 그런지 드가에 대해서는 남다른 친밀감이 생겼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드가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국립도서관에서의 전시였고 단순히 새로운 작품만을 발견한 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드가의 영향력과 생애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전시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흑백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드로잉과 페인팅 뿐만 아니라 판화와 사진을 통해 표현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판화나 사진 같은 기술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드가는 그 당시에는 없었던 흑백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인상파 예술가들 사이에서 그 만의 독특한 위치를 견고히 했다. 그래서 전시회는 그의 예술적 연구에 기여하는 발레리나, 목욕하는 여인 등과 같은 반복적인 모티프를 통해 흑백 판화에 대한 열정과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흑백 작업만 할 것입니다."(« Si j’avais à refaire ma vie, je ne ferais que du noir et blanc ») 라고 에드가 드가는 말했다고 하는데, 그를 인상파 화가의 범주에 넣었던 나에게는 아주 역설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주로 파스텔의 다채로운 매력에 이끌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동시대에 활동했기에 한 묶음의 세트처럼 기계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뜰리에 밖으로 나가 흩날리는 바람과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표현한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드가는 실내, 특히 오페라 속 발레리나를 많이 그렸기에 좀 특이하긴 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는 인상파 환경에서 매우 독특한 흑백에 대한 열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처음으로 드가가 사용한 모든 수단, 즉 흑연 광산, 연필, 목탄, 에칭, 석판화(그리고 모든 판화 리소스), 모노타이프, 페인팅 및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기술적인 용어들이 많이 등장해서 살짝 조사를 해보았는데, 모노타이프는 판화와 회화의 교차점에 있는 과정으로 금속판(구리 또는 아연) 또는 셀룰로이드(드가가 실험한)에 기름기가 많은 잉크나 유성 페인트를 사용하여 페인팅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음각 인쇄기 아래를 통과하면 단일 교정이 인쇄된다고 하는데 사실 기술적인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드가가 이 옅은 인쇄물을 파스텔 색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했구나 정도로 이해하기로 했다.
또한 리소그래피는 지방 물질에 대한 물의 자연스러운 반발력을 기반으로 하는 평면 인쇄 기술이다. 광택이 있고 다소 결이 있는 석회암에 펜이나 연필로 그리는데 잉크 또는 연필의 지방은 표면에 적용된 산성 용액과 고무로 구성된 화학 프라이머 덕분에 지지대에 고정된다. 그런 다음 돌을 적신 후 잉크를 칠하는데 기름기 많은 인쇄 잉크는 도면의 기름기 있는 부분에 적용되고 돌이 젖기만 하는 다른 모든 곳에서는 인쇄가 되지 않는 기술인 듯하다.
1853년, 19세의 어린 드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필사 허가를 얻었고 1856년에 발견한 판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옛 거장들의 포트폴리오를 연구하면서 더욱 커졌다.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등 그가 복사한 옛 거장들의 발자취에서 판화, 에칭의 부활까지 이끌어내며 이 기법을 더 탐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스페인 회화와 에칭에 대한 관심은 드가와 마네의 영감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고 한다. 1860년대 말에 확립된 이 두 화가의 우정은 드가가 조각가로서 활동하는 첫 번째 시기를 마감하며 일련의 초상화로 구체화되었다.
1891년 석판화에 접근한 드가는 화장실에 있는 여자들의 누드 연작을 시작했다. 그는 화장실 장면, 욕조에서 나오는 장면, 몸을 닦는 여성, 머리를 빗는 장면, 옷을 갈아입는 장면 등을 표현한다. 그는 석판에 다양한 전사 방법을 탐구한 다음 추가 또는 마모를 통해 재작업한다. 그러나 기술적 어려움과 그의 안구 문제로 이러한 시도를 끝냄으로써 원본 인쇄에 대한 마지막 기여를 했다.
1895년 드가는 사진가로 활동했는데 이는 회화, 드로잉 및 판화에 의해 수행된 연구를 연장하는 과정이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목탄으로 그린 "목욕하는 여인들", "머리카락"과 석판화들은 그의 젊은 시절 스케치된 인물들의 새로운 아바타였다. 이러한 연속성은 한 기법에서 다른 기법으로 공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제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재생산한다. 그래서 오히려 드가의 작품관을 더 다양한 기법을 통해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한편 진짜 멋진 드가의 명언이 있었는데, "사진은 무시무시한 열정이었고 모든 친구들을 지루하게 했습니다." (« La photographie, ça a été une passion terrible, j'ai ennuyé tous mes amis. »)였다. 아직 무시무시한 열정을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정말 이렇게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리고 마치 에필로그처럼 전시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피카소가 드가를 바라보던 시선을 담은 3점의 판화가 있었다. 피카소가 드가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피카소는 1958년에 드가의 모노타이프 판화를 발견하고 그 중 7개를 구입하여 2년 후에 컬렉션을 완성하고 지속적이고 예술적인 대화를 했다고 한다. 드가의 영향을 받은 판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만의 정체성이 아주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드가 작품 세계의 풍부함을 잘 보여준 이 전시는 국립도서관-리슐리외의 인쇄 및 사진 부서가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드가의 인쇄물 컬렉션이 있어서 가능했다. 오르세 미술관의 드가도 좋았지만 국립 도서관의 드가는 더 좋았다. 여유로운 공간에서 드가에 대한 컨퍼런스를 들은 것 같은 아카데믹한 느낌의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