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나발레 박물관-파리의 역사: 마르셀 프루스트, 파리 소설 > 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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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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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나발레 박물관-파리의 역사: 마르셀 프루스트, 파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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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usée Carnavalet – Histoire de Paris : Marcel Proust, Un roman parisien




지난 번 예고했듯이 내 맘대로 정한 '문학과 예술의 만남' 주간이므로 오늘은 파리에서 나고 자라 파리 그 자체인 작가로 손꼽히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에 관한 전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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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아마도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출판된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소설일 것이다. 아주 명문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아 문학 수업시간에 발췌본으로 자주 배우기도 해서 매번 완독을 시도했지만 한 두 장 넘기다보면 금세 포기하게 되는 책이다. 왜냐하면 프루스트의 문장은 정말 끝이 없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어려운 프랑스어를 아주 아주 길고 디테일하게 묘사하면서 빠른 이야기 전개를 하기에 간결하면서도 임팩트있는 자극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수난의 연속이다. 실제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문장을 길게 쓰니 교수님께서 ‘’너는 글을 프루스트처럼 쓰는구나 !’’ 라고 칭찬도 아니고 욕도 아닌 지적을 하실 정도다. 현명한 글쓴이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프랑스 교수님들 역시 학생들에게 너무 긴 문장을 쓰지 말라고 조언한다. 



보통의 프랑스 작가가 한 문장에 평균 2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면 프루스트는 한 문장에 평균 43개의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휴~ 이런 프루스트에 대적할만한 작가도 한 사람 있는데 그는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이다. 위고의 가장 긴 문장은 823단어로 « 레 미제라블 »에 나온다고한다. 하지만 우리의 프루스트는 « 소돔과 고모라 »에서 856단어의 문장을 썼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어에서는 자주 구두점을 통해 문장을 서로 분리, 표시하거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며 문장을 길게 늘어트리곤 한다. 예를 들어 세미콜론은 중간 지속 시간의 일시 중지를 나타내며 의미에 의해 병치되고 결합된 문장을 분리하거나 문장 자체에 쉼표가 포함된 부분을 분리하는 데 사용된다. 하이픈은 쉼표보다 문장의 요소를 더 명확하게 분리하므로 표현을 명확하게 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모두 마침표가 찍히기 전에 사용하기 때문에 문장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나 같은 불어 초보자들은 문장을 한 호흡으로 길게 이끌고 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간결하게 한 문장에 한 주장밖에 담지 못한다. ㅎ,,,,



어쨌든 프루스트에 대한 뒷담화는 여기까지하고, 오늘의 진짜 목적으로 돌아와야겠다.


카르나발레 박물관은 '파리의 역사' 라는 부제가 따라 붙어있는 만큼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다. 이번에 처음 가보았는데, 위치는 마레지구에 있어서 의외로 익숙한 장소였고 지나다니다 본 기억이 난다. 참고로 이름이 카르나발레인 이유는 16세기 기사였던 카르나발레가 매입해서라고 한다. 건축물 자체로도 정말 아름답고 , 마레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저택 중 하나로 파리에 드문 르네상스 건축물이니 만큼 한번쯤 들러볼 만하다. 



선사시대부터 16세기 초를 보러 가는 길의 계단은 지하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 마치 정말 그 시대로 들어갈 것만 같은 계단이어서 내부구조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은 풍부한 컬렉션을 통해 선사 시대부터 현재까지 625,000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회화, 조각, 모형, 간판, 소묘, 판화, 포스터, 메달과 동전, 역사와 기억의 대상, 사진, 목공예, 장식과 가구들을 서로 보완하여 역사 속 기억을 형성하여 독창성을 갖추고 있다.



선사시대~16세기


그리고 16세기부터 18세기로 가는 길은 고풍스러운 계단으로 한 층을 올라 가게 되어있다. 이 박물관은 파리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박물관에 지속적인 구조를 제공하고자 한다. 발굴 작업을 통해 이뤄진 거의 10,000개의 고고학적 컬렉션이 있었는데 선사시대 전시장 외에는 장식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등등 여러 곳에서 본 듯한 것들이 많아서 빠르게 전시장을 통과했다.



16~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전시관은 현대적인 구조의 계단으로 또 한 층 올라가게 건축되어 있었다. 리노베이션 공사를 했다고 하는데 정말 누가 생각해 낸 것인지 참 역사에 대한 인식과 미적 감각이 결합된 최고의 시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도 알아봐주는 관객이 있으니 박물관 측은 뿌듯할 것이라고 맘대로 생각했다. 특히 ' 프랑스혁명관' 은 인권선언문이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아주 뜻 깊다.



이번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전시는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삶의 대부분이었던 파리와의 관계에 전념하여 프루스트 소설에서의 ‘도시’의 위치에 대해 처음으로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전시이다. 먼저 전시 초반부는 프루스트가 직접 겪은 파리 세계를 탐구한다. 1890년대 말 고등학교(Lycée Condorcet)에서 친구들과 함께 쓴 첫 글부터 파리 상류사회에서의 시작과 결정적인 인물들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학적 소명을 일깨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리'를 집중 조명한다.. 그에게 파리는 예술적, 사교계에 대한 발견, 작가의 개성을 강화하고 그의 네트워크를 강화한 곳으로 구체화된다.



전시의 중반부에서 프루스트의 침실을 연상시키는 큐레이팅 덕분에 작가의 세계에 몰입해 볼 수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그의 가족의 친밀한 삶과 연결된 가구, 그것들을 구성하는 오브제는 창작의 공간을 표현하고 프루스트 작품의 기원을 알 수 있게 한다.



전시의 후반부는 프루스트가 만든 가상의 파리에서 진행된다. 소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건축을 따라 파리의 상징적인 장소를 통해 소설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작품과 도시의 역사 여행이 펼쳐진다. 



솔직히 프루스트라는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찾아간 전시였는데 생각보다 재미는 없어서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내가 완독한 그의 책이 한 권도 없어서 였던 것 같다. 중간 중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들어 온 것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마들렌’이다. 다른 내용은 잘 몰라도 이 기나긴 이야기의 서막이 되어준 마들렌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 ? 


Et tout d’un coup le souvenir m’est apparu. Ce goût, c’était celui du petit morceau de madeleine que le dimanche matin à Combray (그리고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에 Combray에서 작은 마들렌 조각의 맛이었다.) 


소설 속 화자가 마들렌으로 인해 잊고 지내던 과거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문장이 역시나 길어서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과감히 그냥 잘라 버렸다. 그래서 향기나 맛을 통해 사람을 어린 시절로 데려가는 것을 « 마들렌 효과 »라고 한다. 그런데 발자크의 커피처럼 여기서도 상술을 발휘해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팔았다. ㅎㅎ 사실 충동구매를 할 뻔 했지만 나는 현명한 소비자라고 자부하는 편이기 때문에 사지 않았다. 제품화되어 나온 '본마멍표 마들렌' 이 훨씬 싸고 맛도 분명 더 있을텐데… 왜이렇게 비싸게 파는 것일까 ? ㅎㅎ 그래도 솔깃한 기획 상품이었다. 



이 와중에 느낀 것은 정말 누구나 한 번 쯤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마들렌' 이라는 매개를 통해 '마들렌 효과'라는 이름으로까지 붙여졌지만 , 누구나 느끼는 것을 글로 아름답게 풀어내서 전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는 것, 혹은 흔하디 흔한 일상도 흘려보내지 않고 글로 잘 남길 수 있는지 여부가 위대한 작가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라 느꼈다. 역시 글쓰기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기록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뮤지엄 샵에는 귀여운 굿즈들이 많이 있어서 전시보다 더 흥미로왔다. 완전 주객이 전도된 상황^^. 그리고 매번 부분부분 발췌본만 읽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를 샀다..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책을 사고야 만다. (읽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 ㅎ) 그리고 독자분들께 내가 엄살 부리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책의 두께도 찍어왔다. 저정도 두께는 기본이다....



첫번째로, 1925년 신문 Le Temps에서 문학 평론가 Paul Souday는 "소설가의 오류는 독자들이 책을 읽을 시간이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며 이 의견에 동의하냐는 논술 주제였다. 처음에 주제를 받고는 울기 직전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작은 힌트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출판된 후 나온 비평이라고 알려주셨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는 탁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 출간될 당시 그 가치를 인정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복잡한 문체와 매우 긴 문장을 가지고 있고 정확한 주제와 특별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같이 자세하고 섬세한 묘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소설이 독자들의 시간낭비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활동이다. 소설을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우는 것이다. 즉,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타인의 삶이나 시선을 통해 나의 삶을 재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독자의 과거 판단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독자가 미래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창의성을 가져다준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소설은 찬찬히 읽을 때만이 매력이 있다. 주인공의 변화 과정을 느끼면서 읽는 것이 좋다. 이 방법은 메시지가 무겁고 깊을수록 감정이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야기의 의미를 잘 정리하게 된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서두르기 보다는 한 '순간'에 머무를 줄 알며 문장을 진지하게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문학을 느낄 수 있고 바람직한 소설 읽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 속 등장인물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독자를 원한다. 따라서 문학은 읽을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문제가 아니다. 폴 수데이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해야한다. 이야기 중심의 읽기가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텍스트로서의 소설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설은 읽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를 즐겁게 하고 지루함을 해소하는 것만은 아니다. 


더 나아가 소설 속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세한 묘사는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련의 사건들, 드라마틱한 전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요소들이라고 알려준다고 생각한다고 썼던 것 같다. 



나오는 길에 멋진 갤러리들이 많이 있길래 한번 찍어봤다. 다음에 한번 들러봐야겠다.


두번째는 19세기의 유명한 문학 평론가 '샤를 오귀스틴 드 생트 뵈브' 에 대해 배우며 등장했다. 생트 뵈브는 작가의 삶은 그의 문학 작품과 절대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 작품에 대한 올바른 분석은 그 작가의 전기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텍스트의 기원, 창작 과정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르셀 프루스트는그의 문학 비평집 《생트 뵈브에 반대하여》에서 "시를 쓰고 거실에서 말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 L'homme qui fait des vers et qui cause dans un salon n'est pas la même personne »)라고 주장하며 제목부터 대놓고 생트 뵈브를 저격하며 썼다. 프루스트는 "사회적 자아"와 "창조적 자아"를 구별하고 이러한 두 자아를 하나의 "나"로 보는 비평가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것은 문체 분석이 작가의 삶에 대한 고려와 분리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작가가 그의 세계에 제시하는 사람, 그의 사회적 자아는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프루스트의 주장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살아온 사회와 문화에서 배운 관습 언어 생각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살아온 배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창조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와 무관하게 탄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프루스트의 주장대로라면 과연 현실과 예술가, 예술가와 그의 예술 작품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문학 수업시간에 배운 프루스트에 관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다보니 글이 너무 지루해진 감이 있지만 알아두면 유익할 것 같으니 참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문학과 예술의 만남 컨셉의 전시리뷰 였는데 너무 문학이야기에 치중된 것 같아 아쉬운 맘을 뒤로 하고 다음 전시 리뷰 컨셉을 충실히 잡아보기로 했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 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텍스트 이미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갤러리자인제노의 파리통신원 및 객원 큐레이터,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 도슨트로 활동 중이며,
문화예술신문-아트앤컬쳐에 에디터로 리뷰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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