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테옹 /VICTOR HUGO, LA LIBERTÉ AU PANTHÉON > 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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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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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테옹 /VICTOR HUGO, LA LIBERTÉ AU PANTHÉ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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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전시는 미술 작품이 아니라 팡테옹에서 전시중인 빅토르 위고 추모 헌정 사진들이다. 전시 슬로건은 < VICTOR HUGO, LA LIBERTÉ AU PANTHÉON- 빅토르 위고,팡테옹에서의 자유>이다.


팡테옹은 프랑스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신고전주의 성당으로 루이 15세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기념해 성주느비에브 수도원의 성당을 개조해서 높이 85미터의 돔으로 1789년 에 건축한 곳이다. 로마의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고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다. 이 곳의 지하에는 프랑스를 빛낸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데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이 많다. 오늘의 주인공인 빅토르 위고를 비롯해 에밀졸라, 장자크 루소, 마담 퀴리 등이 모두 이 곳 지하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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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재방문한 팡테옹. 팡테옹 주변을  많이 지나는 다녔지만 막상 들어갈 일도 없었고 무덤을 본다는게 약간 무서웠는데 이번에는 빅토르 위고 관련 전시를 한다고 해서 작정하고 방문했다. 지난 학기에 위고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한지라  위고는 나에게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게다가 위고가 프랑스인들에게 얼마나 사랑 받는 작가인지 체감한 적이 여러 번 있는데, 하나는 나의 프랑스 절친이 빅토르위고의 명상시집을 선물하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라고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고 또 하나는 집 주인 아저씨가 나와 처음 만난 날 내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다고 하니  본인은 위고의 두꺼운 레미제라블을  여러 번 읽은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고 프랑스인 특유의 지적 우월감을 드러낸 적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돈 자랑은 창피하다고 생각해  돈 얘기는 꺼리지만 문학과 예술에 깊은 소양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풍부하고 가치있는 문학에 대한 자긍심 또한 대단한 사람들이다. 


팡테옹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웅장함에 놀라고 무언가 경건해짐을 느낀다.  중앙의 < 푸코의 진자> 를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봐야 제대로 보는 건진 모르겠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니 굉장히 신기하다. 



(1851년, 레옹 푸코는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진자를 설치하기 위해 팡테옹의 돔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이를 통해 지구가 스스로 회전한다는 것을  증명하려했다. 그는 판테온의 돔 입구를 통해 직경 1.4mm, 길이 67m의 철사로 직경 17cm, 28kg(납을 부은 내부)의 황동 공을 매달았다.)전시장 해설참조



1층의 웅장함을 뒤로 한 채 위고를 만나러 지하로 향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져 사실 혼자 관람한다면 무서울 뻔 했다. 지하 전체가 다 묘지인데 복도로 연결되는 방들이 미로처럼 배치되어 있다.



빅토르 위고의 국가 장례식과 그가 1885년 6월 1일 팡테옹에 입성한 것은 프랑스의 역사에 기념비가 될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전시장 입구부터 장례식 장면들을 배치했다. 



다음은 전시에 대한 설명을 번역한 내용이다. 


 파리 전역에서 200만 명이 참석한 이 특별한 행사는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 및 정치 인물 중 한 사람을 기념한다.  자유에 관한한  확고한 수호자인 그는 공화주의 가치를 위해 일생 가차 없이 싸웠다. 그의 죽음에 제 3공화국은 위대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할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유산임을 주장했다. 인권과 시민의 권리의 출현, 의견과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 앞의 평등, 교육의 권리는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문제가 된 모든 주요 원칙이었다. 시인이 잠들어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이 특별한 경의임을 주목한다.


빅토르 위고는 이 특별한 장례식과 팡테옹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문학적 천재, 인기 있는 작가이자 헌신적인 정치가인 그는 자신의 작품과 삶의 상당 부분을 자유의 정복과 수호에 바쳤다. 1851년부터 자발적으로 망명한 시인은 진정한 정치적 양심으로서  자유의 영웅으로 변모하는 거리의  저항 투사가 된다. 1859년 그는 나폴레옹 3세가 제안한 사면을 거부하면서 "자유가 돌아오면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선언했고 10년 후 두 번째 사면을 거부했다. 


사형 폐지, 사회 정의, 보통선거와 민주주의, 만인을 위한 교육, 세속주의 등 그의 젊음과 망명의 위대한 투쟁이 그대로 남아 있다.빅토르 위고의 젊음은 사회적 문제, 사형과 사형 폐지, 노예제, 비참함과 검열로 특징지어졌는데 1830년의 에르나니 전투로 그는 낭만주의의 확실한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는 이를 예술의 자유로 정의했다.



위고 시의 일부를 발췌해서 캡션을 달아놓은 것도 많았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것은 


“문학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의 산물입니다. 이 원칙은 세기의 원칙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1830년 3월, 에르나니 서문이다. 낭만주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글이라고 배웠는데 잊고 있다가 이 글을 보니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로댕이 조각한 빅토르위고의 흉상도 있었다. 요즘 로댕을 전시장에서 자주 만나는 것 같아 이 작품도 사진으로 남겨봤다.



우리가 잘 아는 레미제라블의 코제트도 작은 동상으로 전시되어있었고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상징적인 인물도 그려져 있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위고의 묘실은 전시장에서 조금 나오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방에는 위고 뿐만아니라 에밀졸라, 알렉산드로 뒤마가 함께 하고 있었다. 프랑스인 뿐 아니라 나도 사랑하는 작가 3인이 같은 방에 잠들어 있고 그  장소에 내가 서 있다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영광스러운 기분이었다.



팡테옹에 들어오기위해서는 정의,애국,영광 그리고 죽음 이 4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이 천장벽화에 그려져있는데 정말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명예이고 프랑스인들에게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안겨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위대한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위고의 작품들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해 준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 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텍스트 이미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갤러리자인제노의 파리통신원 및 객원 큐레이터,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 도슨트로 활동 중이며,
문화예술신문-아트앤컬쳐에 에디터로 리뷰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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