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드도쿄: 우분투-루시드 드림/ 제이 라미어-계속 불타오르게/ 사라 말로르-트리콘티넨탈 시네마 / 맥스웰 알렉산더-새로운 힘
본문
Palais de Tokyo : Ubuntu, un rêve lucide/ Jay Ramier- keep the fire burning (gadé difé limé)/ Sarah Maldoror- cinéma tricontinental/ Maxwell Alexandre- new power
이번 월요일 갑자기 4시간 공강이 생기는 바람에 이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미술관 나들이를 하며 예술적, 문화적 소양을 쌓기로 하고 '팔레 드 도쿄' 로 향했다. 물론 도서관에서 수업 내용을 복습하거나 이틀 후 있을 시험을 미리 미리 대비할 수도 있었지만 역시 공부는 벼락치기로 해야 제 맛이다는 게 나의 신조이므로....
사실 '팔레 드 도쿄' 는 코로나 전인 2년전 쯤 한 번 갔다가 전시 내용이나 컨셉이 너무 난해한 컨템퍼러리 아트였던지라 살짝 걱정하며 가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미술관이니 만큼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고 자주 다니며 친해져야 겠다고 큰 맘을 먹은 것이다. 우선 한 줄 평 부터 하자면, 역시나 나의 걱정은 적중했지만 그래도 좋은 도전이었다! .이해와 공감이 힘든 부분은 분명 있었지만 도전하지 않는 자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 정도의 지적 수확에도 스스로 만족한다.
먼저 맨 위층에는, 실제로 착용했을 것 같은 티셔츠들이 줄을 서 있었다.
« 우분투, 루시드 드림» 은 아직 우리의 상상력과 지식으로 자주 사용되지 않는 공간인 '우분투' 에 투자할 것을 제안하는 전시다. '우분투' 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복잡한데 그 의미는 남아프리카의 반투족 언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인류, 집단 및 환대의 개념을 결합하며 "나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로 해석된다. 이 전시는 2월20일까지 여서 21일에 간 나는 직접 전시를 보진 못했는데 전시장 캡션과 그 전시 작품의 일부인 나란히 줄을 지어 서 있는 옷들을 볼 수 있었다.
우분투 사상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인류의 전통적 틀을 훼손한 모든 종류의 노예제,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600년에서 살아남은 아프리카 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많은 아프리카 언어와 문화에 뿌리를 둔 우분투 사상은 지역 사회에서 개인의 위치에 대한 개념에서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취지와 의미를 텍스트로는 공감하는데 널린 옷들로만 진행되는 이러한 전시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좀 당황스럽다.
아래층에는 3개의 전시가 더 있었는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래퍼인 '제이 라이머' 에 관한 전시들이었다. « 제이 라미어-계속 불타오르게 »는 라스코 프로젝트 10주년을 기념하여 개신교와 탈식민주의 운동인 프랑스 힙합의 선구자인 아티스트 제이라이머를 초대한 전시이다.
제이 라이머는 1980년대의 신조화된 리듬으로 새로이 싱코페이트(강박을 조금 달리 표현함을 의미) 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사운드를 샘플링하는 것처럼 그림, 이미지, 아카이브 및 불투명한 사운드를 결합하여 아프리카 디아스포라(특정 민족이 자의적,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 의 내레이션 집단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 및 사운드를 조합한다. 라이머의 음악을 통해 흑인 디아스포라의 교차점을 관찰한다. 인종적 긴장을 배경으로 1970년대에 등장한 흑인 미국 음악인 펑크(Funk)에 특별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거기 담긴 삶의 비극과 정치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자신을 구축한 힙합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시장이 콘서트홀처럼 꾸며져 있고 전체적인 벽은 어둡지만 조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쏘고 있었다. 랩이나 힙합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다소 지루하던 찰나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Edouard Glissant ! 지난 학기 <프랑코폰 문학> 시간에 배운 'l’antillanité' 의 창시자이다. 기말고사 점수를 아주 잘 받는 바람에 좋아하게 된 작가이다. ㅎㅎ본인이 받은 점수에 따라 작가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지는 나의 단순함에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참고로 Edouard Glissant(에두아르 글리성)는 아프리카에서 카리브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흑인 노예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다양성, 교잡, 개방성을 기반으로 한 카리브해 정체성의 개념인 ' l’Antillanité' 를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성찰은 문화의 교차를 특징으로 하는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주제이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오면 항상 스스로에게도 배운 것을 환기시킬 겸 언급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봉주르 파리>독자들이 미술뿐 만 아니라 문학적 깨알 지식도 얻어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