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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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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비통 재단: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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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7 – 2026.03.02
Fondation Louis Vuitton: Gerhard Richter  


루이 비통 재단은 2014년 개관 이후 20세기와 21세기의 중요한 작가들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이 건축물은 유리, 철골 구조의 곡선 구조만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재단은 동시대 미술의 역사적 맥락을 재구성하는데 특히 회화, 조각, 설치, 음악과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 경험을 감각적·사유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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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현재 독일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진행중이다.  1932년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1961년 뒤셀도르프로 이주한 뒤 현재까지 쾰른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는 리히터는 2014년 재단 개관 당시부터 소장 작품을 통해 소개된 바 있으나, 이번 전시는 규모와 연대기적 면에서 전례 없는 특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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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1962년부터 2024년까지의 작품 275점을 한자리에 모아, 유화, 강철 및 유리 조각, 연필과 잉크 드로잉, 수채화, 회화적으로 개입된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른다. 한 화가의 60년에 걸친 창작의 전과정을 포괄적으로 제시하여 그의 작업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사진을 바탕으로 한 초기 작품부터 추상 회화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리히터만의 작업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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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언제나 회화라는 언어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회화는 그에게 끊임없이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실험의 장이었으며 그의 작업은 어느 하나의 범주로도 고정되지 않는다. 드레스덴 미술대학에서 전통적인 회화 교육을 받고, 정물·초상·풍경·역사화 같은 고전적 장르를 익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어떤 주제든 눈앞의 풍경이나 대상을 그대로 보고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사진이나 드로잉 같은 다른 이미지를 한 번 거친 후 그것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그림을 만든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붓 뿐 아니라 나이프나 스퀴지 같은 여러 도구를 사용하며 회화로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를 계속 실험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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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초기부터 리히터의 주제 선택은 복합적이다. 이탈리아 디자인 잡지에서 가져온 테이블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지운 1962년 작품 「탁자(Tisch)」를 비롯해, 개인적 과거를 환기하는 가족 초상「루디 삼촌(Onkel Rudi)」, 「마리안네 이모 (Tante Marianne)」 그리고 독일 역사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폭격기(Bombers)」 연작이 함께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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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1960년대 중반, 그는 「네 개의 유리 패널」이라는 조각과 초기 「색상표(Nuanciers de couleurs」를 통해 회화의 환영적 관습에 이미 문제를 제기한다.  도시 연작에서는 표현주의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물감을 두껍게 올린  임파스토 회화를 그리지만, 풍경과 바다를 그린 작품들에서는 전통적인 회화 장르를 빌려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회화의 방식 자체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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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1972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해 제작된 「48인의 초상」은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는 회화적 도전의 결정체로 번짐 기법(Vermalungen), 티치아노의 「수태고지」를 단계적으로 복제하고 해체하는 과정, 대형 색상표에서의 색채의 무작위적 배치, 그리고 회색 회화에서 나타나는 재현과 표현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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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리히터는 자신만의 추상적 접근 방식을 본격적으로 구축한다. 수채화로 제작한 습작을 회화로 옮기고 확대하며 회화의 표면 자체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붓질 그 자체를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 동시에 그는 딸 베티(Betty)의 초기 초상들을 그리기 시작하고 풍경과 정물이라는 주제에 대한 탐구 역시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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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예술적·사회적 변화에 대한 깊은 회의적 인식 속에서, 리히터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이례적으로 대여된 연작 「1977년 10월 18일(18. Oktober 1977)」을 제작한다. 이는 비교적 최근의 독일 현대사를 명시적으로 다룬 유일한 작품군이다. 이 시기 그는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어두운 추상 회화들을 만들어내며 초기의 가족 회화를 다시 호출해 「사비네와 아이(Sabine mit Kind)」 연작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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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리히터에게 드로잉은 미리 계획하고 조절해서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즉흥적으로 그리는 드로잉은 그가 회화에서 하는 실험과 같다. 1980년대 동안 그는 꾸준히 드로잉을 이어갔고, 1999년에는 45점으로 이루어진 드로잉 연작을 통해 이 작업을 하나의 국면으로 마무리한다. 같은 해 빈터투어 쿤스트뮤지엄(Kunstmuseum de Winterthur)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 이 작품들은 처음으로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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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가족과 함께하는 삶은 늘 리히터의 삶과 작업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1996년 막내딸 엘라 마리아가 태어나고, 그는 쾰른 한발트(Hahnwald) 지구에 작업실을 갖춘 새 집으로 이주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개별적인 추상 회화보다는 고유한 구조와 색조를 지닌 연작 형식의 작업에 집중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진을 바탕으로 한 사적인 회화들과 나란히 배치된다. 일상의 사소해 보이는 대상들은 리히터의 시선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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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2002년, 리히터는 쾰른 대성당 남쪽 트랜셉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설계하는 임무를 맡으며 새로운 실험의 국면에 들어선다. 「실리카트(Silikat/규산염:유리와 관련된 재료)」와 「케이지」연작을 완성한 이후, 그는 유리라는 매체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며 화가로서 직접 제작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구상한 작품들을 제작하게 한다. 2007년 완공된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위해 그는 색채의 배치를 우연에 맡기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4,900가지 색을 무작위로 배열하는 변주를 거쳐, 흐름의 상당 부분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유리 위 래커 회화(lacquer painting) 실험이었다. 이 과정은 유리 위에 래커(니스·광택 코팅제)를 칠해 색과 빛, 질감을 우연에 맡기며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탐구하는 회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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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2014년, 리히터는 긴 공백 끝에 다시 회화를 시작한다. 그가 처음으로 되돌아간 주제는 다시금 독일의 과거였다. 그는 수년간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이미지를 찾고자 했으나, 그 충격과 압도감을 충분히 담아낼 방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르케나우(Birkenau)」 연작의 출발점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수용소에서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수감자들이 촬영한 사진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수용소 내 사진을 바탕으로 리히터는 여러 차례 변주하며 사건의 충격과 무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그 결과, 초기 사실적 이미지에서 점차 추상적인 형태로 발전해 최종적으로 네 점의 추상 회화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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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현재 리히터는 책상에 앉아 작업한다. 드로잉에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 제작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추적할 수 있다. 작업은 연속적으로 진행되기보다는, 며칠 혹은 몇 주의 시간 안에 하나의 묶음이 형성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새로운 드로잉 작업들에서 리히터는 매체의 작동 방식과 그 가능성 자체를 탐구한다. 그는 선, 프로타주, 음영 처리 등을 활용하며 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기법들을 실험한다. 무엇보다도 무의식적인 손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색 잉크를 종이에 떨어뜨려 우연히 생긴 모양을 관찰하고 컴퍼스, 자 등 다양한 도구로 재현하는 과정을 즐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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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ndation Louis VuittonPhoto: Han Jisoo 

이번 전시는 리히터의 60년이 넘는 창작 여정을 한 공간에서 보여준다.  사진처럼 사실적인 초기 회화는 눈앞에 스며드는 현실감을 주고, 이어지는 작품들은 점점 추상과 색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인다. 넓은 색면이 겹치고, 우연과 의도가 뒤섞인 흔적이 남은 작품 앞에서는 컬러필드 페인팅이 연상되기도 했다. 동시에 리히터는 인간과 역사, 기억에 대한 깊은 사유를 자극하고 있다. 회화적 실험과 감각적 여정을 함께 경험하며 작가가 보여주는 시각적 세계의 다층성과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화커뮤니케이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예술 현장의 숨결을 기록하며 언어와 문화 사이의 미묘한 결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현재는 다양한 문화예술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파리의 이야기를 수집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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