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팔레: 힐마 아프 클린트 > 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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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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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팔레: 힐마 아프 클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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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6일 – 8월 30일
Grand Palais: Hilma af Klint 

그랑 팔레는 미술과 과학, 패션, 디자인이 교차하는 파리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공간이다. 현재 이곳에서 스웨덴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의 프랑스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그랑 팔레와 퐁피두 센터가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는 그동안 미술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그녀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며 추상미술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서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전시는 100여 점이 넘는 회화와 드로잉을 통해 힐마 아프 클린트의 창작 세계를 다층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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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스톡홀름 왕립미술학교에서 정통 미술 교육을 받은 힐마 아프 클린트는 초상화와 풍경화 등 전통적인 회화를 제작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실험적인 작업을 지속했다. 신지학(Theosophy)과 영적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예술을 눈에 보이는 현실의 재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도구로 이해했다.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선, 원, 식물과 같은 유기적 형태, 기하학적 기호들은 우주의 질서와 생명의 순환, 인간 의식의 성장을 상징하는 시각 언어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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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힐마 아프 클린트는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보다 앞선 1906년부터 기하학적 형태와 강렬한 색채, 유기적 상징을 결합한 추상 회화를 제작하며 추상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상 회화가 당대에는 이해받기 어렵다고 판단해 사후 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작품 공개를 유예하도록 유언을 남겼고, 이로 인해 작품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98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The Spiritual in Art》전을 계기로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추상미술의 기원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 중요성이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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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의 대표작인 〈신전 회화(Peintures du Temple)〉(1906~1915)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공개된다. 이 연작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군으로, 총 10개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대형 연작 〈열 개의 가장 큰 그림(The Ten Largest)〉은 인간의 탄생과 성장, 성숙, 노년이라는 삶의 순환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낸 대표작이다. 인물과 상징, 기하학적 형태가 어우러진 화면은 가시와 비가시,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 과학과 영성, 장식적 언어를 하나의 조형 세계로 융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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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이 작품들은 다섯 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영적 연구 모임 ‘드 펨’(De Fem, 힐마 아프 클린트, 시그리드 헤드만(Sigrid Hedman), 안나 카셀(Anna Cassel), 코르넬리아 세더버그(Cornelia Cederberg), 마틸다 닐슨(Mathilda Nilsson))의 활동 속에서 탄생했다. 영매 세션에서 이루어진 자동 드로잉은 힐마 아프 클린트가 기존의 자연주의적 화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추상 회화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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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북유럽 민속 문화, 자연과학, 신비주의적 영성 등 서로 다른 지식과 상상력의 층위가 작품 속에서 교차하며 예술·과학·영성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시각 언어로 통합된다. 이를 통해 그녀의 작업은 추상미술의 기원을 단일한 기점이 아닌 확장된 역사로 다시 사유하게 하며, 보이지 않는 질서를 감각화하는 독자적인 조형 체계로 읽힌다. 나아가 이번 전시는 힐마 아프 클린트를 단순한 추상미술의 선구자를 넘어, 세계의 이면에 흐르는 질서를 응시하며 현대미술의 감각과 사유의 지평을 확장한 작가로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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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1907년, 힐마 아프 클린트는 색연필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작업 방식에 중요한 전환을 맞이한다. 기존에 스케치북 위에서 흑연으로 이루어지던 자동 드로잉(의식적인 구도 설정 없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려지는 방식)은 점차 독립된 종이 위에서 보다 구조적인 형상으로 발전해 나가며, 꽃잎의 형태나 다채로운 나선, 색채의 프리즘과 같은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작업은 당시 미술의 관습을 벗어난 매우 이례적인 시도로 추상 회화의 결정적인 단초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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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이러한 조형 언어의 배경에는 힐마 아프 클린트가 이른 시기부터 참여했던 영매주의 모임의 경험이 자리한다. 그녀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차원의 존재, 이른바 ‘상위 존재’와의 소통을 통해 이미지와 기호를 받아들이고 이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특히 1891년 가을, 화가 발보리 할스트롬(Valborg Hällström)이 작업실에서 심리 그래프(psychographe)를 사용하는 장면은 중요한 전환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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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바퀴가 달린 나무 판 위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연필을 고정한 장치를 통해 자동 드로잉이 생성된다. 이때 나타나는 선들은 즉흥적인 흔적으로 남는 동시에, 이후 특정한 의미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지닌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선들은 자유로운 아라베스크 형태의 궤적을 이루며, 때로는 문자나 상징적 기호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러한 ‘매개적 드로잉’은 보이지 않는 메시지나 상태를 기록하는 중간적 형태의 이미지로 이해되며, 기록 노트에 정리되어 하나의 작업 과정으로 축적된다. 이는 1896년부터 1910년까지 ‘드 펨(De Fem)’이 수행한 영적 교신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흔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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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힐마 아프 클린트는 1904년 신지학 협회에 참여하면서 보다 체계적인 사상적 기반을 갖추게 됐다. 이 단체는 산업 자본주의가 야기한 물질주의적 세계관과 탈주술화된 현실을 극복하고자 불교적 지혜와 기독교적 밀교 전통을 결합한 보편적 정신 체계를 제안하며 새로운 영적 르네상스를 지향하는 공동체였다. 신지학적 영향 아래 그녀의 작업은 점차 상징과 형상의 복합적 언어로 전개되며, ‘신전 회화’ 연작에서는 우주론적 상상력과 영적 탐구가 조형적 구조 속에 응축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각 언어는 고대 철학과 연금술적 사유 등 다양한 전통적 지식 체계와도 교차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화하려는 시도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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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이와 맞물려 그녀의 조형 세계를 형성한 또 다른 중요한 기반은 19세기 후반 스웨덴 사회 전반에 확산된 민속 문화와 전통 예술에 대한 관심이었다. 당시 스톡홀름에는 1872년 북유럽 박물관이 설립되고 1881년 스칸센(Skansen) 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농촌 생활과 전통 양식을 보존하고 재현하려는 문화적 흐름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아프 클린트 역시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프 클린트는 박물관 소장품을 수채화로 복제하는 작업을 맡으며 민속적 사물과 이미지에 깊이 접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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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특히 스칸센에서 제작된 한 수채화는 목재 공예와 자수 직물 등 생활 문화 속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드러내며, 그녀는 이러한 일상적 오브제들에서 반복되는 구조와 상징을 추출해 회화적 언어로 전환했다. 대표적으로 꽃과 덩굴이 소용돌이 형태로 전개되는 스웨덴 전통 장식 문양 ‘쿠르비츠(kurbits)’나,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간의 생애를 단계적으로 배열한 ‘삶의 계단’과 같은 서사적 모티프는 이후 ‘열 개의 가장 큰 그림’ 연작에서 보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형상 체계로 재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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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그녀는 색을 물리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과학적 관점과, 색을 인간의 감정이나 정신 상태와 연결하는 상징적 관점을 함께 받아들이며 색의 질서를 탐구했다. 즉, 색은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정과 내면의 상태를 드러내는 언어로 이해된 것이다. 예를 들어 붉은색은 강한 욕망이나 에너지, 노란색은 집중과 사고, 파란색은 차분한 명상과 같은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회화를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감정과 정신의 구조를 드러내는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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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alais, Photo: Han Jisoo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들은 색의 흐름과 곡선의 움직임, 단순한 도형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통해 전반적으로 안정된 인상을 준다. 화면 속 형상들은 절제된 구성 안에서 오히려 더 분명한 균형감을 형성한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색채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로, 부드러운 색감과 맑고 투명한 파스텔 톤이 시선을 자연스럽게 머물게 한다. 곡선과 기하학적 형태들이 반복되며 구축하는 구조는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기보다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편안한 인상으로 남는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화커뮤니케이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예술 현장의 숨결을 기록하며 언어와 문화 사이의 미묘한 결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현재는 다양한 문화예술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파리의 이야기를 수집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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