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리포트 - 바우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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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같은 곳이라는 바우하우스. 올해가 바우하우스 100주년이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30주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국에서 온 부모님과 베를린을 겨울 바캉스 장소로 선정했다. 마침 우리 가족과 친분이 있고 베를린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최상도 오빠를 가이드로 데사우까지 기차를 타고 바우하우스에 도착했다. 문득 10년전 중학생때 독일 뮌헨에서 건축물 투어를 할 때도 부모님과 친분이 있던 재독 건축가 임혜지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전문가와 함께 하는 투어는 언제나 옳다!
바우하우스는 독일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고, 예술적 창작과 공학적 기술을 통합한 새로운 교육 기관이다. 근본적인 목표는 ‘모든 조형의 예술적 교의(敎義)와 기술적 교의를 하나의 건축 예술에 불가불한 성립 요소를 종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 생활에 봉사하고 종합하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으로는 인간이 기계에 의해 노예화되는 것을 방지하며, 기계가 갖고 있는 어떠한 장점도 희생하지 않은 채 기계의 단점을 제거시킨다. 또한 일시적인 신기한 것은 창조가 아니며, 우수한 표준을 창조하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내용으로는 공작 교육과 형태 교육이 있다. 공작 교육은 석재, 목재, 금속의 재료를 다루는 기능 교육이다. 형태 교육은 재료의 분석, 구성, 표현의 교육이다. 공작 교사와 형태 교사로 짜여 이론 교육과 실제 교육을 병행했다.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바이마르, 데사우, 베를린, 뉴 바우하우스까지 4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바이마르 바우하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생겨난 바이마르공화국 때 탄생했으며, 그로피우스가 아르 누보 양식과 독일공작연맹의 장점을 고안해 설립한 디자인 교육 기관이고, 표현주의의 로맨티시즘 표현을 시도했다.
제2기(데사우 바우하우스)는 우파 정권이 바우하우스 폐쇄를 요구하여 데사우(Dessau) 시장이 데사우로 이전하여 시립화했으며, 수공이 아닌 기계적인 생산을 위한 원형을 제작하여 모던 디자인의 기초가 된 시기이다.
제3기(베를린 바우하우스)는 1930년 세계경제 대공항으로 바우하우스가 폐교 직전이었으며, 1932년 미즈 반 더 로에가 학장으로 취임하여 베를린에서 사립학교로 개교했으나 교수와 학생이 모두 해산되고, 사설 연구소로 전락했다. 특히 나치당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1년 만에 폐교되었다.
제4기(뉴 바우하우스)는 모홀리 나기(L. Moholy-Nagy)가 미국 시카고에서 설립했다.
아동미술용어 사전
처음에 학교 내부를 보면서 든 생각은 '앗! 뭐가 대단해서 이렇게 유명한 곳으로 소문이 났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이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1919년 즉 우리나라가 3.1 만세를 외칠때 이런 모던한 건축물이 지어졌다고 생각해보니 마음이 살짝 달라졌다. 바우하우스에 대한 설명은 전문가의 텍스트에 의존하기로 하고 유유자적 건물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그 시절 건축가들의 흔적을 느껴보았다.
바우하우스는 건축물 외에도 다양한 디자인의 가구 특히 의자도 유명한 것 같았다. 겉보기와 달리 직접 앉아보면 편안함이 느껴졌는데 역시 독일의 건축이나 디자인은 실용성을 중시하는건 아닌가 싶었다.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녹두의 취향에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ㅎㅎㅎ
그 옛날에 지은 건물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건물구조와 인테리어라는 점은 볼수록 신기했다.
교장들의 사진들을 주욱 걸어둔 벽들을 지나오는데 차가운 추상의 대명사 칸딘스키 또한 이 곳의 교수였다니 대단한 위상의 학교임엔 분명하다. 하지만 바우하우스가 유명한 것은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구축한 아카이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사우라는 이 작은 마을은 바우하우스 하나로 일약 유명해졌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나올 때 꼭 들르는 곳이 기념품 샵인데 그 곳에서 오히려 나는 바우하우스의 컨셉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좀 아이러니긴 하다.
바우하우스를 나와 조금 걸어가니 교수 기숙사로 쓰였다는 건물들이 나왔다. 맞은편 골목에 일반적인 전통양식의 집들이 자리잡고 있어 바우하우스 건물과는 대조적인 느낌을 주었다.
모던한 느낌의 이 건물 안에 들어가 보니 매우 멋스럽긴 하나 여기에 살고 싶진 않다고 동행들에게 말했다. 왜냐하면 일단 노출콘크리트들이 내부에까지 계속 이어져 마치 회색벽에 갇힌 도시인이 된 듯 했기 때문이다. 4동의 건물 중 한 곳의 교수 기숙사는 그나마 벽이 다양한 색으로 칠해져 있고 안락한 느낌을 주어 가장 마음에 들어 이 정도면 사람이 살 만하겠구나 싶었다.
지금 우리 눈엔 익숙하다 못해 식상할 수 도 있는 건축물이 당시엔 엄청나게 획기적인 시도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요즘 최신 유행하는 신종 컨셉스토어들도 시간이 지나면 평범하고 식상해지겠구나 싶었다. 이래서 건축이나 디자인은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의 실험정신과 탐구정신, 무모할 정도의 도전이 계속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