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o & Jeanne-Claude /퐁피두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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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 & Jeanne-Claude
크리스토(Christo Vladimirov Javacheff)는 1935년 6월 13일 불가리아 가브로보에서, 잔느-클로드(Jeanne-Claude)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났다.
1952년 소피아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크리스토는 프라하에서 무대미술을 배웠고, 빈에서 잠시 유학한 후 1958년 파리에서 잔느-클로드를 만났고 이들은 1962년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으며 수많은 프로젝트를 함께 작업하였다.
두 사람은 병, 의자 등의 오브제를 포장하는 작업을 하다 1961년부터 공공장소와 건물로 작업의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막대한 자금과 대규모의 협상이 요구되어 작업을 조직하는 데만 보통 몇 년이 소요되곤 하였다.
도시에서 선보였던 프로젝트들에는 베른의 《포장된 쿤스트할레》(1968), 파리의 《퐁네프》(1975~1985), 베를린의 《포장된 라이히슈타크》(1971~1995) 등이 있다. 또한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는 비스케인 만에 위치한 열한 개의 섬을 폴리프로필렌으로 감싸는 작업인 《둘러싸인 섬》(1983)을 보여주었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오렌지색 깃발을 설치하는 데에는 무려 25년 이상을 뉴욕시(市)와 협상하여 성사시킬 수 있었다. 《The Gates》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2005년 2월의 도심 속 황량한 공원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며 도시민에게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였다.
"우리의 예술은 오직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이들 부부는 수십 년 간 호흡을 맞추며 그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러던 중 2009년 11월 18일 잔느-클로드가 뉴욕의 한 병원에서 뇌동맥류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은 크리스토는 오래 전 서로에게 한 '크리스토와 잔느-클로드의 예술을 계속한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전하였다. 그러던 그가 지난 5월 31일 84세 일기로 사망했다. 11년 후 아내 품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는 오래전 아내에게 한 ‘크리스토와 잔느-클로드의 예술은 계속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근까지 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출처/네이버)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3월부터 약 5개월간 서울에 머무르다 지난 주에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프랑스는 입국 후 따로 격리 기간은 없지만 일주일간 집에서 조용히 그동안 비워 두었던 집 청소와 새학기 준비를 하다가 한국에서부터 벼르던 'Christo & Jeanne-Claude' 전시에 다녀왔다. 간만에 들른 퐁피두센터는 여전히 공사중이었으나 공사 현장의 가림막마저 예술적이다.
한편, 이 와중 프리다 칼로, 마르셀 뒤샹 등의 대표작을 아이콘으로 만들어 코로나 방역 수칙을 설명해 놓은 퐁피두센터 입구의 센스가 돋보였다. 또한 전시관 입구와 출구를 반대 방향으로 구분 지어 놓아 처음으로 야외 엘리베이터도 타보았다.
< 당신을 위해 우리는 모든것을 실행한다!>
<야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파리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크리스토 부부의 작품은 초등학교때 리움미술관에서 처음 보았는데 당시 설치 미술의 개념을 전혀 몰랐던 나는 센트럴파크를 주황색 천으로 둘러씌운 풍경의 거대한 사진을 보고 크리스토와 장끌로드가 사진작가인 줄 알았었다. 설치 미술 중에서도 대지미술의 장을 개척한 두 사람은 예술적 동지애를 평생 유지했던 것으로 아는데 전시 도입부에는 초기 다양한 시도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아르브뤼( Art Brut : 전통적인 의미와 거리가 있는 세련되지 않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미술)의 개념을 만들어 냈던 장드뷔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잭슨폴락의 느낌을 준 작품도 있었다.
위 작품들은 독일 종합예술가 '안젤름 키퍼'를 연상시켰다. 확실히 동시대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안젤름 키퍼의 작품 이지미를 퍼왔다.
퐁네프나 개선문, 센트럴파크, 국회의사당 처럼 항상 큰 건축물만 포장하는 줄 알았는데 조그만한 것들부터 시작해 대형 건물까지 다 감싸서 작품을 만들어 왔다.
가려진 창문들은 크리스토 포장 예술의 연장선인 작품들이다. 내부의 내용물들이 미스터리하게 가려지고 의도적으로 관람객의 시각으로부터 배제하지만 그 안의 것은 그래도 볼 만한 것은 아닐까 하는 호기심을 끌어내고자 하지 않았을까?
퐁네프와 개선문을 감싸기 위한 준비 과정들인데 대부분의 전시는 작가노트들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 설계도를 읽지 못하는 지라 내 눈에는 다 똑같은 암호로만 보였는데 거대한 대지 미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과학적 준비 과정이 물밑에서 다 이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토와 장클로드는 그들의 작품을 실제 완성시킬 때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그 도시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문화예술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작가에게는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설치미술 혹은 공공미술에도 이런 개념을 도입하면 좋을 듯하다.
이 전시는 지난 5월말에 세상을 떠난 크리스토의 추모전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 부부의 모든 프로젝트는 1회성이 아니라 건축물이나 지형지물 그 자체를 미술품으로 변모시키는 '대지미술'의 새로운 역사였다. 1985년 파리 퐁네프 다리를 4만876m 의 거대한 황금색 천으로 포장한 것, 1995년 독일 베를린 의회를 10만m의 하얀 천으로 덮었던 엄청난 설치 작업들도 모두 2주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니...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부부가 이토록 철저하고 많은 준비를 거쳐 탄생한 작품들이 그저 사진으로만 스케치로만 남아 있음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애초부터 우리들의 작품이 오래 지속되길 기대하지 않았어요." (잔 클로드)
"예술 작품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건 신화에 불과해요. 우리 부부가 만든 작품은 잠깐 지속되지만 모든 사람의 뇌리에 남아요." (크리스토)
대지미술의 세계를 개척한 두 거장의 말에서 개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간의 아쉬움도 접을 수 있었다.
퐁네프에서 설치작업을 하던 당시 사진
<퐁피두에서 나와 크리스토의 대단했던 발자취를 느끼고 싶어 퐁네프 다리까지 걸어가 보았다.. 1975~1985년 십년간의 프로젝트였던 황금 퐁네프를 직접 보았다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개념미술은 말 혹은 글로 작가의 의도를 관람객들에게 조금 친절하게 알릴 필요가 있기에 도슨트가 그 어떤 전시보다 필요한데 이번 전시에서는 코로나 때문인지 따로 도슨트가 운영되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때로는 도슨트를 따라 다니는 것이 감상에 방해가 될 때도 있지만 지난번 프란시스 베이컨 전시때처럼 도슨트와 함께 이번 전시를 보았더라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사실 전시장 내부에 있는 직원들은 시큐리티들이라 관람객의 간단한 질문에도 답을 하지 못하며 1시간짜리 영상물을 보라는 말만 했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과 1시간이나 있는다는 건 요즘 현실에서는 기피해야만 할 것 같아 영상 보기는 포기했다. 말이 나온 김에 미술관이나 페어에서의 도슨트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다. 지난 7월 서울의 아시아프에 갔을때에도 스태프 명찰을 달고 수십명의 작가 노트를 가지고 있는 직원들 조차 질문을 하면 그저 적혀진 내용을 그대로 읽어 주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전시의 마무리는 아트샵으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