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주년 기념, 비운의 화가 임군홍 <The painter>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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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주년 기획으로 납북화가 '임군홍'전이 7.27(목) ~ 9.26(화) 까지 강남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에서 열린다.
임군홍의 작품은 서양화의 기법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정취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풍경화와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의 전통적인 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유화 「봄 스케치」로 처음 입선한 임군홍은 이후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서화협회전람회에 연속 출품하였고, 1936년부터 41년까지 선전에 여인상과 풍경을 그린 작품이 거듭 입선하며 양화가의 위치를 굳혔다. 1936년에는 송정훈(宋政勳), 엄도만(嚴道晩) 등과 ‘녹과전(綠果展)’을 만들어 1938년까지 3회의 동인 작품전을 가졌고 1938년 서울 오아시스다방에서 소품 21점으로 개인전을 가지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대까지 서울, 신징, 베이징, 한커우에서 산업미술과 순수예술의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나 1948년 교통부의 신년 달력에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 사진을 실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수개월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며 한국전쟁 이데올로기 속에서 월북을 한 것이 가족과 생이별은 물론 한국 미술사에서 잊혀진 작가로 남게 된 시대의 비극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유족에 의해 30~40년대 작품들이 보관되어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게 됨은 천만 다행이였다.
현재 남아있는 임군홍의 유화 작품은 약 130점에 이르는데, 이는 모두 1930년대 중반에서 1950년까지 약 15년 사이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화가들 중에서 이 정도 규모의 유화 작품을 남긴 이는 매우 드물다
임군홍 외에는 배운성, 이쾌대 등 주로 월북한 화가들이 1930-40년대 작품을 상당량 남한에 남겨 놓았을 뿐이다. 박수근, 이중섭 등 월남 한 화가들이 이 시기 작품을 모두 북에다 남겨두고 내려온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역사의 아 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에게 남겨진 이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양화계 를 이해하고 실증하는 데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가 이번 전시가 가진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아트앤컬처)
예화랑 김방은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미술사적으로 다시 재평가되고 기려야 할 작가이며, 이번 전시를 통해 임군홍 작가와 작품을 알리고 이 작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어 이 전시를 기획했다"라며 이번 전시를 준비해 온 소회를 전했다.
화가 임군홍 작품 '가족'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둘째 아들 임덕진씨 (사진=아트앤컬처)
100여점이 넘는 작품을 보관해왔던 임군홍의 둘째 아들 임덕진씨는 어려운 형편에도 부친의 작품을 위한 공간을 따로 두고, 작품보관을 최우선으로 해왔으며, 목돈이 생기면 복원전문가에게 훼손된 작품을 복원해 왔다며 지난 시절을 회상하면서, 작품들 중 임덕진씨 자신이 어머니 품에서 아기로 있을때를 그린 '가족'은 내 품에서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작품”이라며 큰 애정을 표현하였다.
임군홍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앞으로 좀 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한 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디자인 사업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위해 고투했다고 볼 수 있다. 생계로 시작한 것이라 해도 디자이너로서의 임군홍 또한 그의 선구적인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화가로서의 임군홍의 위치도 재평가 될 여지가 많은 임군홍의 작품들을 직접 확인해 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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