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중, 안재홍, 윤향란, 이길래 4인전 《선과 획 사이》 개최
김종영미술관 별관 1, 2, 3전시실, 2025.4.4(금)~6.8 (일)

본문
예술의 시작은 선(線)이었다. 아득한 선사시대, 인류는 점과 선만으로 동굴 벽화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새겨 넣었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미술의 근본을 이루는 ‘선’을 주제로 한 특별한 전시가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다. <선(線)과 획(劃) 사이>展은 김범중, 안재홍, 윤향란, 이길래 네 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시각과 방식으로 탐구한 ‘선’의 다채로운 면모를 한자리에서 조망한다.
안재홍, 나를 본다-자라다 (세부사진), 200~220cm, 가변설치, 2004-2005. © 작가, 김종영미술관
김범중, 장지에 연필, 왼쪽부터, Stereodium(2015), Ignition(2025). © 작가, 김종영미술관
윤향란, 즉흥 드로잉, 광목천, 실, 아크릴릭, 가변설치, 2025. © 작가, 김종영미술관
이길래, Drawing 2023-2(좌), Drawing 2023-3(우), 210x148cm, 한지에 먹, Dip pen, 혼합재료, 2023. © 작가, 김종영미술관
이번 전시에서는 평면 작업을 선보이는 김범중과 이길래, 그리고 입체 작품을 통해 선을 구현하는 안재홍과 윤향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네 작가의 작품은 단순히 선이라는 공통분모를 넘어, 오랜 시간 축적된 예술적 공력(功力)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김범중과 이길래의 드로잉 작품 앞에서는 마치 티베트 승려가 모래로 정교한 만다라를 완성해가는 듯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섬세하고 반복적인 선들의 움직임은 깊은 집중과 수행의 과정을 연상시킨다. 반면, 안재홍과 윤향란의 입체 작품은 재료의 물성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구사된 선묘(線描)를 통해 생동하는 기운을 표현하고자 한 서화가의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K컬처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K미술에서는 점과 선을 매개로 내면의 성찰과 수행을 강조한 ‘단색화’가 주목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전시에 참여한 네 작가의 작품 또한 한국 미술의 정신적인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시를 관람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점과 선은 조형의 근원이자 출발점으로 인식되지만, 서양에서는 ‘점과 선(line)’이라고 표현하는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점과 획(劃)’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선과 획의 차이’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지난 세기 서양에서는 추상미술의 등장과 함께 점, 선, 면 등 조형 요소에 대한 분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저서 『점, 선, 그리고 면』이다. 서양 미술에서 점과 선은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으로, 기하학적으로는 무수한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룬다고 정의된다. 특히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는 도형’으로 정의되는 ‘점’은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반면, 동아시아의 전통 서예에서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이라는 독특한 공부법이 존재한다. ‘永’ 자를 통해 한자의 기본적인 점과 획을 쓰는 여덟 가지 운필(運筆)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永’ 자의 첫 획인 ‘측(側)’은 단순히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점획’이라는 용어처럼 점을 ‘긋는’ 행위를 포함한다.
‘선(線)’과 ‘획(劃)’이라는 단어 자체에서도 그 의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線’은 ‘실(糸)’과 ‘샘(泉)’이 결합된 글자로, ‘그어 놓은 금’이나 ‘줄’과 같은 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반면, ‘劃’은 그림(畵)과 칼(刀)이 합쳐진 글자로, ‘긋다, 구획하다, 나누다, 구별하다’ 등 동사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차이를 통해 ‘서양은 명사로 세상을 바라보고, 동양은 동사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철학적 관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요컨대, ‘획’은 행위에 방점을 찍는 개념으로, 그 안에 작가의 의도와 의지가 담겨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점획의 미학이 지향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본질적인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지점이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주희와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하며 이번 전시의 의미를 강조한다. “옛 학문을 깊이 생각하여 정밀을 더하고 발전시킬 줄을 새로 안다면 깊이는 더욱 깊어지리라”는 주희의 말과 “좀 더 멀리 뒤를 볼 수 있으면, 좀 더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있다”는 처칠의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술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김종영미술관의 <선(線)과 획(劃) 사이>展은 단순한 작품 전시를 넘어, 우리 미술의 근원을 되짚어보고 동서양의 예술관을 비교하며 깊이 있는 사유를 이끌어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과 철학적 의미를 탐색하는 여정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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