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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전시

나순단 개인전 《현존의 기억》 개최

에이치플럭스, 4. 23. - 4.30. / 국회아트갤러리, 5.1. -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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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치플럭스(H-flux)갤러리는 4월 23일부터 30일까지 나순단 작가의 개인전 <현존의 기억>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몸을 감각의 주체로 삼아 외부 세계와의 교감을 형상화한 신작 약 19점을 선보인다. <현존의 기억>은 H-flux 전시를 마친 이후, 5월 1일부터 16일까지 국회아트갤러리에서 이어서 개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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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단  개인전 《현존의 기억》전시전경 © 작가, 에이치플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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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단  개인전 《현존의 기억》전시전경 © 작가, 에이치플럭스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는 오랫동안 외부 세계를 눈에 보이는 대로 포착하려는 재현을 미술이 행해야 할 사명처럼 여겨왔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세계의 포획자로서 이성적 주체의 능력을 과시하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해 온 동양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분화되기 이전의 ‘무위자연’의 상태를 동경해 왔다. 이러한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을 포획하려는 분석적인 눈의 논리가 아니라 자연과 동등한 조건에서 교류하려는 감각적인 ‘몸’의 논리이다. 대뇌의 이분법적 사고작용이 없는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나순단의 회화는 그러한 동양적 세계관을 따라 몸이 외부 세계와 교류하고 몸이 기억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언젠가 외계와 만나 찌릿하게 공명하며 한순간의 불같은 사랑을 나눈 흔적이다. 그의 작업은 의식을 몸과 마음에 집중하여 이러한 과거의 강렬한 기억을 소환하고, 그때의 감정과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감정이 먼저인지 이미지가 먼저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몸에 각인된 무의식적인 이미지들을 생성해 낸다. 어떤 경우는 최면을 통한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발견한 내적 불안의 요인이 되는 무의식적 이미지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작품은 결과적으로 현실에 있음 직한 어떤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공간이나 서사가 선형적이지 않고 꿈속의 이미지처럼 비현실적이고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살바도르 달리나 막스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회화에서처럼 전적으로 무의식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미지들은 자신이 과거 현실에서 외부 세계를 직접 경험한 리얼리티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몸과 세계가 상호 침투하며 정보를 교환하는 역동적인 ‘연기(緣起)’ 작용을 포착하려 했다는 점에서 ‘과정적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주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인간의 몸은 유동적이고 다층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는 몸에는 “물리적 질서와 생명적 질서, 그리고 인간적 질서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형성되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질서를 지닌 몸이세계 속에서 핵심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고 동시에 독립된 개체로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이중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몸의 질서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분법적인 대뇌의 지적인 분별 작용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또한 표현주의 예술에서처럼 주체의 주관적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주객이 미분화된 몸의 생명 작용을 응시하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위해서는 외부로 흩어진 산만한 정신을 거둬들여 오직 몸에 의식을 집중하여 현존해야 한다. 그래서 몸이 이완되고 뇌파가 세타파(4~8Hz)로 고요해지면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꿈, 몸과 우주의 경계가 사라지고 어떤 몽환적인 이미지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의 회화는 뜬구름같이 모호한 이러한 이미지에 질서를 부여하며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몸의 이미지를 소환해 내는 작업은 깊은 몰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명상 수행과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작업은 자신이 오랫동안 실천해 온 명상과 요가 수행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안한 감정을 정화하는 치유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 작업은 화려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강아지풀과 교감하며 문인화의 정신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음이 끌린 하나의 외부 대상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최근작들은 그림의 대상을 외부 대상에서 자신의 몸으로 치환함으로써 몸의 기억이 생성해 내는 다층적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그럼으로써 명상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타성에 젖은 종래의 양식에 파격적 변화를 불러왔다. 이러한 과감한 변화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화두가 된 몸의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종래의 단조로운 표현에서 벗어나 자기 몸의 현존이 생성해 내는 풍요로운 시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변신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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