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과 만난 AI望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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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최은영(2023광주미디어아트 페스티벌 전시감독)
일상에서 기술을 분리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 테크놀로지를 또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모든 예술은 명명되기 이전 존재한다. 오늘의 AI아트 역시 그렇다. 예술가들은 청각에서 시각으로 그리고 촉지각으로 예술을 변화 혹은 진화시켰다. 예술가를 인류의 촉각이라 부른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주장대로 그들(예술가)은 늘 우리보다 먼저 미묘한 낌새를 눈치채고 수많이 ‘사이’ 속에서 ‘차이’를 들어낸다. 즉, 예술은 일종의 레이더로서 기능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회 목표와 정신 목표를 발견할 수 있게 하고 시일이 경과한 뒤에는 그것에 대처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일종의 조기경보 체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인간의 보철적 존재로 공생하고 있으며 그 리얼리티가 오늘날의 또 다시 새로운 예술로 구현되고는 한다.
Lentiscape-망산수70x100cm lenticular 2023
Stable Diffusion, 풍경4 NVIDIA RTX A5000 x2 2023 인공지능작
망산수도(望山水圖) 130×160㎝ 한지에 수묵채색 2023
望산수도1 60×90㎝ 한지에 수묵채색 2022
번산수도(Burn山水圖)1 122×170㎝ 한지에 수묵채색 2023
여기 또 다시 새로운 예술인 AI와 전통채색화의 융합이 있다. 나형민 작가는 전통적 시각매체를 넘어 렌티큘러, 미디어산수, AI페인팅까지 다양한 매체의 결과물로 자신의 예술적 영역을 확장한다. 확장에 대한 가설은 순수 혹은 전통적인 매체의 예술과 다르지 않다. 시각적 아름다움과 작가적 상상, 사회에 대한 발언과 작가의 새로운 철학이 담긴다. 다만 여기서 작동되는 예술의 기술적 재생산은 전통에서 요구되었던 감동의 아우라보다 감탄에 가깝게 보인다. 그렇다면 감탄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사실 전통의 예술도 감탄으로 시작된다. 사실과 똑같이 그린 화가의 손끝에서, 생각을 뒤집어 놓은 개념의 시작에서 우리는 감동 이전 분명 감탄의 선행을 거쳤다.
■望산수도
“하늘은 여유 있는 해와 달을 주었고, 사람은 좋은 원림을 빌리네(天供閑日月, 人借好園林).”_백거이
경계의 위쪽에 떠 있는 보름달은 수묵으로 선염한 비백으로 주로 달(月)의 이미지로 인식되지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볼 때 해(日)이기도 하다. 따라서 감상자의 시선에 따라 해(日)이기도 하고 달(月)이 되기도 하며, 시간상으로는 낮이 되기도 밤이 되기도 한 경계에 서 있는 풍경이다. 해이든 달이든 여백의 원상에 담긴 상징성은 현대인의 소망과 비움의 뜻을 내포한 기원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였다.-나형민 작가노트 중
나형민의 이상향은 자연을 빌려 원림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모습을 재현한 것이 아닌 꾸며 놓은 산수, 즉 재구성한 산수이자 동아시아의 원림(園林)과 닮았다. 원림은 정원(庭園)과는 다르다. 정원은 조경용어로서 집 앞 뜰에 인위적으로 자연을 꾸며 놓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반해 원림은 교외 자연 속에 정자와 집을 만들어 놓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내 집안에 자연을 만드느냐, 자연 속에 내 집을 만드냐의 차이로 정원과 원림은 다르다. 바로 이 다른 지점이 나형민의 산수를 자연의 일차원적 재현이 아닌 원림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이 설정된 원림에서 이상향을 바라보는 행위는 유유자적 그 자체다. 작가는 와유(臥遊)의 대상으로 망산수도를 설명하는데 이는 옛날 중국의 회화이론가인 종병(宗炳)에서 비롯된, “젊어서 산천을 돌아보고, 늙어서 이들을 그려 벽에 걸어 놓고 그 속에 노닌다.”는 와유(臥游: 臥以游之의 준말로서 산수화를 보며 즐기는 일)라는 동아시아 산수화의 전통사상이 담겨 있는 듯하다.
■미디어 望산수도와 AI 望산수도
게다가 현대적 실험성이 가미된 나형민의 렌티큘러 망산수도 역시 아름다운 산수 앞에 보기 좋은 나무를 심고 해와 달이 보이는 맑은 곳에 근경과 중경, 원경의 레이어를 두어 심도를 높였다. 심도 있는 공간은 막힘이 없고 보이지 않는 공간감을 제공해서 보이지 않는 그 공간은 휴식의 장소가 된다. 때문에 이곳은 감상의 공간인 동시에 영혼을 평온하게 해주는 이상향이 된다. 원림으로 望산수 한다는 것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신명이 깃들었네.”라고 말한 당나라 시인 심전기의 말처럼 사람의 성정을 기탁하는 곳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빌려 생명을 위로하고 표현해 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형민은 자신의 산수를 바라보는 일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바라봄으로 얻어지는 행복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를 통해 얻어지는 편안함을 익히 알고 있기에 자연에 기탁한 마음으로 산수를 바라본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탁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앞에 새로운 장치를 제공했다. 정신적 이상향에 인공지능을 가미해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가는 실험을 시도한다. 이들의 작품은 보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사유 체계를 확장시켜 때론 무한한 상상을 가시화해 낸다. 인공지능이 나형민의 망산수도를 학습해서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하는 일을 목격한 감상자는 적극적 사유의 체계에 놓이게 된다. 어느 때보다 작가가 제시한 예술에 동참하며 개념의 이유를 생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유와 신체(화면을 포착하려는 행위)는 능동성을 띄게 된다. 또한 공간예술이었던 시각예술 시간예술로의 확장도 그러하다. 시각적 포착으로만 감상하고 떠나는 전시 공간이 아닌 사유의 시간 할애를 통해야만 진정한 감상이 가능한 작품들은 작품 안에 시간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유희 혹은 감탄이 발생하고 결국 예술의 궁극 목적 중 하나인 소통에 다다를 수 있는 창구가 하나 더 열리게 되는 셈이다.
예술에 있어서 인공지능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 낯선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나형민이 제시한 작품은 낯설지 않은 체험을 가상이 아닌 현실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전술했던 전통예술을 가치 판단했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렌티큘러, 미디어산수, AI페인팅 등 기술이 결합된 망산수도 작품들이 우리에게 선보인 것은 익숙하지 않는 기술이 아닌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개념처럼 사용된 기술, 그 기술을 통한 사유 감각의 확장성, 확장된 사유 감각에서 오는 새로움, 그 새로움을 통한 신선한 가치 발견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을 통한 사유 감각의 확장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획득한 감각을 뛰어 넘는 새로운 사유와 예술!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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