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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개인전 《푸른 산의 환영展》

몸으로 만나는 환영의 공간-이정원의 山中摸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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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만나는 환영의 공간

-이정원의 山中摸索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산에서 길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에는 이미 나 있는 길 외에도 수많은 길이 잠재적으로 열려있어서 혼돈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산에 올라가서 만나는 다양한 감각을 한정된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산의 윤곽만을 단순화하여 종이 위에 그리거나, 겉모습만을 간단하게 사진으로 찍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잡아내는 것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대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산의 피동적인 허울일 뿐이다. 산에서는 눈으로 ‘만나는 것’의 실체조차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숲에 들어가면 전체를 볼 수 없고, 숲 밖으로 나오면 속속들이 펼쳐지는 숲의 경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산의 실체는 잡으려 할수록 늘 멀리 달아난다. 화가는 어떻게 산의 실체를 화폭에 잡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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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덕유, 130.3×89.4cm, mixed media on canvas, 2024.ⓒ 이정원 갤러리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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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1, 53×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24.ⓒ 이정원 갤러리 내일 



산을 좋아하는 화가 이정원은 산의 부름에 호응하듯 오랫동안 산을 찾아다녔다. 산속에는 많은 길이 있지만, 산의 전모는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는 흔히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서 산의 모습을 만나곤 했다. 이를테면, 산은 그녀에게 새벽에 해가 떠오르기 전 푸른 미명에 둘러싸인 모습과 같이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가오곤 했다. 거기서 만난 불가사의한 빛을 머금은 산의 모습은 그녀가 화가로서 화폭에 구현하고 싶은 풍경의 원천이었다. 산에서 접한 그러한 신비감은 기존의 풍경화나 산수화의 상투적인 투시법으로는 재현 불가능했다. 그녀 또한 한때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보았지만, 사진에 찍힌 것은 다만 산의 밋밋한 실루엣일 뿐이었다. 특히 잡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산에서 온몸으로 느꼈던 생생한 ‘임장감(臨場感)’이었다. 



이정원의 회화는 자신이 받아들인 이러한 산 고유의 ‘실재감(實在感)’을 평면 위에 구현해내기 위한 ‘산중모색(山中摸索)’의 결실이다. 일반적인 투시법은 시야에 들어오는 한정된 경치의 한쪽 면밖에는 잡아낼 수 없다. 외부 세계를 조망하는 인간의 시야는 물리적으로 망막에 맺히는 상(象)만을 수동적으로 잡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는 시각적인 정보와 함께 신체가 전체적으로 느끼는 감각의 총체이다. 올망졸망한 연봉들이 겹겹이 늘어선 한국의 산들은 다양한 시각적 변형을 일으키며 끊임없는 허상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잇닿은 산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어느 정점에 올라가서야, 그러한 시각적 혼란에서 벗어나 산의 전모를 어느 정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점에서 전면적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산의 모습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불명료한 공간에 산재하기에, 이를 하나의 통일된 화면에 한꺼번에 잡아내기는 더욱 어렵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산의 연봉이 서로 만나는 계곡이 주름을 이루며 담아내는 빛의 다양한 흐름과 효과에 주목했다. 산들이 줄줄이 놓인 그릇처럼 품고 있는 빛의 음영을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그녀는 우선 한국의 바위산들이 가진 독특한 연봉의 구조와 맥락을 풀어내야 했다.



그녀가 이러한 산에서 느끼는 ‘임장감’은 직접 ‘신체’의 감각으로 대면해야만 한다. 직접 산을 오르내리며 몸을 움직여 거기에 빠져들 때만 몸 전체의 감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감을 환영이 아닌 신체의 감각으로 느끼는 체험은, 화폭 위에서 공간의 실재감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잡히지 않는 공간을 더듬어 찾아가듯이 그녀는 산에서 받아들인 감각의 세포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캔버스 위에 쌓아나갔다. 이러한 전체적 감각을 되찾아가는 그녀의 시선은, 마침내 산이 가진 입체적 공간을 평면의 화폭에 효과적으로 구축했던 겸재의 진경산수화와 만났다. 18세기 한국의 윗대 화가가 성취했던 ‘실경(實景)’을 포착하는 통합적인 시각과 방법론을 통해 그녀는 산의 감각을 화면에 되살릴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녀는 진경산수화에서 얻은 귀중한 실마리를 바탕으로, 캔버스에 산의 구조적인 윤곽을 종합적으로 펼쳐내는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일정한 폭과 두께로 썰어낸 파쇄지를 빈틈없이 잇대어 붙여 뼈대로 삼고 살을 입혀 산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실재의 질감을 구현해냈다. 



‘파쇄지’를 이어붙여 만들어낸 질감은 붓의 필획을 대신하여 산의 근육이 되는 ‘준법(皴法)’의 효과를 대신하였고, 화폭에 역동적인 재질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겸재의 그림에서 힘찬 붓질로 잡아낸 바위산의 질감을 대체하는 전혀 새로운 그녀만의 방법이었다. 그곳에 골짜기의 굴곡에 알맞게 아크릴의 안료를 분사하여 서로 다른 깊이를 부여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겸재의 산수화와는 또 다른 조형적 성취이다. 그녀의 작업은 단순한 산 풍경의 재현을 넘어서 실재에 버금가는 환영을 평면 위에 구현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정원의 작업은 겸재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정신적 유산을 발전적으로 계승한다고 할 만한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이렇게 하여 한국의 산들이 품고 있는 공기와 물리적 체적을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재구조화하여, 그 현상학적인 외형의 현현(顯現)을 한정된 평면에 적절하게 가시화한다. 이러한 작업에는 감각적 환영을 넘어 실체에 상응하는 물질적 실체감이 존재한다. 동양화의 붓의 필선을 대신하여 그녀가 화면에 쌓아나가는 파쇄지의 두께가 산의 실질적 감각을 부피가 있는 공간의 감각으로 바꾸어 산들이 가진 근육질 피부의 흐름을 평면 위에 특별한 감각적 세계로 옮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파쇄지의 틈마다 대기를 머금은 듯한 화면은 단순한 평면 위에 깊이와 두께를 가지고 실재와 비실재를 넘나드는 옵티컬한 공간을 구현한다. 이러한 공간은 환영과 실재 사이에서 보는 사람의 구체적인 신체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겸재가 전체적으로 조망된 산의 ‘실경’을 화면에 구조적으로 펼쳐낸 것처럼, 화가 이정원은 산에서 신체의 감각으로 접했던 구조적인 실재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축해낸다. 그녀의 작업에서 연이은 산봉우리들은 전체가 서로 밀접하게 맞물리는 하나의 구조로 화면 안에서 다시 만난다. 잇대어 쌓아나간 종이들의 집적으로 생겨나는 줄기와 주름은 동양화의 준법에서 나오는 선들의 필세(筆勢)를 대신하여 산세가 만드는 공간을 틔워나가며 그것을 화면에서 구조적으로 엮어낸다. 파쇄지로 구축한 구체적 질감의 대비는 진경산수화에서 준법이 조성하는 음과 양의 조화를 가진 화면의 분위기와도 상응한다. 파쇄지 단면의 흐름과 미세한 틈들 위에 전체적으로 골고루 분사된 색에 의해 화면은 깊이를 구현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잠재적 공간으로 수렴함으로써, 그녀가 구축한 감쪽같은 환영(幻影)의 공간은 몸의 감각이 만나는 깊고 푸른 실재의 영토가 된다.



평론제공  갤러리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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