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경험, 제유의 공간”
정석도(철학박사, 동아시아 미학연구소장)
한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회화는 인간의 의식 가운데서도 가장 내밀한 정서의 단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훌륭한 미술 작품은 한 개인(화가)의 정서를 초월해서 동 시대의 일반적 정서를 가시적으로 구현한 공간이었다. 특정 시대 특정 공간에는 대체로 그 시대의 정서를 회화적으로 수렴한 미술사조가 존재했다.
현재는 다르다. 어떤 공간에서든 이른바 미술 사조를 형성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현재적 시점에서 보자면 한 사람의 화가가 곧 하나의 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사조의 혼재 혹은 메타 사조의 시대에 이제 대부분의 그림의 가치는 미술사적 차원에서 규정되기보다 단지 장식적 가치로서 그 의미가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각종 이미지의 범람에 따라 이미 시대적 감각이 세련되게 변했다. 이발소 그림으로 폄하했던 그림의 범주에 기성작가의 유화나 산수화를 포함시킬 정도가 되었다. 이렇듯 변화한 감각의 배후에는 특히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시선이 존재한다. 과학의 시선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기존의 전통적 회화 공간을 대신하는 과학적 공간의 탄생을 뜻한다. 비디오와 영화는 이미 고전적 매체에 속한다. 디지털 사진과 인터넷 기반의 각종 매체에 말미암아 기존 회화의 환영적 공간감은 이제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회화를 초월한 환영적 공간의 범람이 회화의 본질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과학 기술이 제아무리 발달하고 과학적 사실에 의해 공간이 새롭게 해석된다고 해도 ‘육필’의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 예술의 대안이 될 수는 있어도 예술의 본질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은 가령 인공지능이 인간의 이성을 대리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성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체할 수 없는 언어적 본질로서 인간성은 곧 과학적 공간으로 대체할 수 없는 회화의 정신성과 통한다. 회화의 정신성은 또한 회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안현곤은 회화의 본질에 주목하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만일 우리가 화가를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견할 의무를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면 그가 바로 여기에 잘 어울린다. 그는 독특한 조형 재료의 발견에 치중하지 않고 기존 재료와 기본적인 조형요소를 사용하지만 자신만의 개방된 관점으로 사물과 공간을 재해석함으로써 회화의 본질을 사유한다. 작업의 면목을 보면 무엇보다 ‘존재의 경험’에 치중하는 성향이 돋보인다.

안현곤, Metamorphosis2, 2021, mm on Canvas, 100 x 100 cm © 작가, 갤러리한결

안현곤, With or without you, 2021, MM on Canvas, 92 x 70 cm © 작가, 갤러리한결

안현곤, With or without you, 2022, MM on Canvas, 100 x 50 cm © 작가, 갤러리한결
그는 우선 ‘선’을 소환한다. 다 알고 있듯이 ‘선’은 동아시아 전통회화에서 특히 중요시하던 조형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선’은 동아시아 전통 철학 개념 가운데 하나인 ‘기(氣)’가 가시적으로 환원된 형태다. 그러나 안현곤의 작업에서 ‘선’은 기하학적 선이 병존한다. 거기에 사유의 흔적을 얼마간 자동 기술적으로 병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와 차이가 있다. 겉으로만 보아도 그의 선은 부드러운 모필의 선이 아닌, 아주 예리한 시간의 틈을 형성하는 가늘고 딱딱한 선을 많이 사용한다. 때문에 노출된 선은 각인된 흔적마냥 화면을 파고드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화면에서 선은 강한 운동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때로 무한히 확장되기도 하고 때로 본래의 기점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마치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일정한 법칙 없이 배경에 난립한 선의 경우 밑도 끝도 없이 지속하는 사유의 양태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정형적인 선의 집적과 무채색 색면의 융합을 포함해서 특히 감긴 실타래 같은 원의 형상은 더욱 더 강한 운동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물체가 정지된 듯 보이는 형상 그대로의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화면에서 선은 또한 점이기도 하고 면이기도 하다. 선으로부터 확장되고 융합된 공간은 최종적으로 시적 운율을 형성한다.
시적 운율은 선과 결부되어 화면에 형성된 심상을 뜻한다. 이제 화면에서 선은 ‘길’이라는 형상으로 재현되며,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시적 언어’ 및 노자의 ‘도(道)’를 떠오르게 한다. 먼저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Sagen)를 물리적인 언어(Sprechen)와 구별하면서 침묵의 언어인 ‘시적 언어’를 통해서 물리적 언어가 어떤 영역에서도 말하지 못하는 전반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 노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자가 말하는 ‘영원한 도’와 ‘영원한 이름’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적 언어’와 상통하는 것으로, 존재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본질과 소통되는 언어이다.
하이데거나 노자의 ‘시적 언어’는 회화의 본질을 간파하기 위해 소용된다. 안현곤의 그림에 등장하는 언어(문자) 또한 ‘시적 언어’와 연관된 해석의 여지가 있다. 안현곤의 그림에서 문자(단어) 또한 직선적 배치를 통해 하나의 ‘길’의 형상으로 최종적으로 수렴된다. 거기에는 단어의 의미가 제시하는 의미의 방향으로서의 은유적 ‘길’과 조형적으로 환원된 형상적 ‘길’, 즉 직선적 배치로써 가시적으로 ‘선’의 형태로 수렴되는 조형적 ‘길’이 존재한다. 두 갈래의 길(선)은 꼬인 새끼마냥 하나로 병존한다. 감상자의 처지에서 보면 화면에 나타난 독일어 단어를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화면 안에서의 문자는 결국 회화적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소통의 기능은 분절되었고 대신 시각적 이미지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적이다. 언어를 넘어 선 언어의 본질과 통한다. 즉 그것은 회화적으로 수렴된 존재의 경험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손으로 재현한 기계적이고 기하학적인 선과 문자의 직선적 배열, 이런 것들은 모두 작가의 의식을 거쳐 재현된 존재의 경험이다. 그의 작업 가운데에는 점점이 문자(단어)를 쌓아 형성한 커다란 얼굴 실루엣이 등장한다. 독일 유학 중 늘 보던 작업실 근처의 나무의 형상에서 유추한, 역시 문자이미지를 통해 구축한 커다란 두상의 형태도 등장한다. 식물로부터 유추한 자연적 생태적 감각의 드로잉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 바로 ‘존재의 경험’이다. 회화적으로 수렴된 존재의 경험이야말로 안현곤의 작업에서 부유하는 공간성에 토대를 둔 회화성의 핵심요소다. ‘존재의 경험’은 ‘점’, ‘선’, ‘면’, ‘색’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회화의 조형요소를 통해 그림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작가의 작업 의도와 교차된다.
안현곤의 그림에서 특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미지로서의 단어’가 가진 조형적 의미다. ‘이미지로서의 단어’는 육필의 문자 드로잉을 포함해서 기계적으로 복제된 형태의 문자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 가운데 기계적 문자의 직선적 배열은 현대사회의 특별한 정서와 감각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사실성이 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보아 현대사회의 정서는 기계적 언어와 그 문자의 감성 또한 깊게 사고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감각적 체험이 이미 우리들에게 풍부하게 전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선과 점 및 도상이미지 만으로 구성된 화면 외에 때로 실물 오브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총괄적으로 기본적인 평면회화의 조형요소와 도상 이미지를 활용해서 재현한 회화 공간은 이제 사물과 사유의 회화적 본질이라는 더 큰 세계와 제유적으로 관계 맺는다.
수사법으로서 제유는 부분으로써 전체를 대변하는 방식이다. 안현곤의 사유의 문법은 존재의 경험에 천착한 이미지를 제유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데 있다. 화면에는 종종 단 하나의 커다란 도상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물의 형상에서 유추된 것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배경의 공간에 흡수되는 공간의 분할이기도 하다. 즉 이미 실물 형상을 탈피한 도상적 성질을 띠고 있다. 그러한 것에서 우리는 그 이미지의 제유적 성격을 발견한다. 화면 정중앙이나 모퉁이에 등장하는 단일 형상은 파편화된 존재의 경험이지만, 또한 그것은 회화의 본질과 맞물린 세계의 구조, 다시 말해 회화적으로 수렴된 세계의 진상을 대변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형상성은 또한 형상 자체로서 조형적으로 언어화되는 것을 초월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형상은 공간에 스며들고 융합되어 결국 공간의 유희로서 안착한다. 따라서 우리는 안현곤의 작업 형식을 두고 시각적 형상에서 비롯한 구상적 혹은 추상적 변별을 넘어 제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유의 실타래를 회화적으로 또한 공간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안현곤의 작업은 특히 현대적이며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다 개념적 작업이 가세해서 전체적으로 그의 작업은 자연적 심상에 기초하면서 현대의 도시적 감각이 결합된 양상을 띠고 있다. 화면의 바탕이 되는 공간을 마치 밤하늘이나 우주와 같이 무한히 개방된 상태로 제시하는 공간감각과 그 위 정중앙에 배치된 대칭적 형상 등은 부유하는 세계의 실상을 회화적 사실성으로 치환한 것이다. 그의 감각을 통해 우리는 그의 작업이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문제는 정체성이다. 안현곤의 작업은 다른 화가와 달리 형식적으로 패턴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의 작업을 두고서 하나의 형식적 패턴을 통해 보는 세계가 아니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세계의 실상에 대해 하나의 정의된 관점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과 통한다. 그랬을 때의 문제가 바로 화가의 정체성 내지는 작업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패턴화한 작업을 하는 화가들, 가령 누구 작가라고 하면 금방 그에 상응한 작업의 형태를 떠올릴 수 있는, 특허와도 같은 작업을 작가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반면 일정한 형식적 패턴을 갖지 않고 개방된 개념적 패턴을 갖는 안현곤의 작업은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평가에 직면하기 쉽다. 더군다나 그의 작업은 많은 경우 독일유학의 체험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층 더 정체성에 관한 부정적 평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세련되면서도 현대사회의 단면을 대변하는 소외된 이미지의 색상들, 기계적 문자의 정연한 배열, 이런 것들마저 그러한 빌미가 될 수 있다. 독일어 문자는 가장 직접적인 빌미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신중하게 화면을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회화에 있어서의 정체성이 설령 민족적 국가적일 수는 있어도, 화가의 정체성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안현곤의 작업에서 존재의 경험 속에서 우러난 다양한 형상이미지와 그것을 회화적으로 수렴하는 가운데 제시되는 점, 선, 면, 색채의 운동성 및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러한 것들의 종합으로 형성되는 시적 운율은 다름 아닌 동아시아 전통회화의 창작 정신 및 그 운율과 맞닿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이 문화 유전적이든 개인의 경험에 한정되어 있든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작가의 세계의 뿌리는 더 먼 우리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아도 현재의 그의 작업은 독일 유학 이전의 작업과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어 있다.
때문에 가령 우리는 그가 모국어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존재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을 좀 더 눈여겨보아야 한다. 독일어 단어를 문자이미지로 사용함으로써 그의 ‘선’은 문화적 경험을 수반한 형태로 확장된 것이다. 이러한 확장은 사실 개인의 정체성을 더욱 견실하게 하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라고 볼 수 있다. 안현곤의 작업은 개념적 패턴에 의해 조형적 변화를 추구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또한 지금처럼 형식적 패턴을 지양하는 방식을 견지하면서 끊임없이 회화의 본질을 지향하는 여정이다.
제공: 갤러리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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