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겸의 개인전 ≪Papier Sculpté, Sculpture Pliée / Sculpted Paper, Folded S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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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
김재도 (본 전시 기획자,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김인겸의 개인전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 Papier Sculpté, Sculpture Pliée/Sculpted Paper, Folded Sculpture≫은 김인겸이 1996년 퐁피두 센터의 초대로 파리에 정착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변화된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이다.
김인겸의 작품들은 각 시기별 시리즈를 통해 나눠볼 수 있다. 1970년대 유기적 형태의 <생성>, 사각의 기하학적 형태에 틈을 내고 구멍을 내는 등 김인겸 특유의 조형 요소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1980-1986년 <환기>, 1987-1999년 <묵시공간> 연작이 1970년대에서 1990년대를 구성한다. <묵시공간> 시리즈는 중간에 <Project>시리즈의 등장을 기준으로 나뉘는데, 전반은 청동 주조를 사용한 조립 형식이 특징이라면, 후반은 철판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조각의 덩어리에서 탈피한 면(面)의 구축이 특징이다.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현 아르코 미술관)에서 개최된 동명의 전시에서 선보인 <프로젝트-사고의 벽 Project-The Walls of Thought>(1992)과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인 <프로젝트21-내추럴 네트 Project 21-Natural Net>(1995)가 대표작인 <Project>시리즈는 기존의 조각 어법을 확장시켜 작품이 놓이는 공간 및 건축물과의 긴밀한 관계가 주축이 되는 설치작업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스테인리스 스틸, 블랙 미러와 같은 현대적인 소재를 도입하여 면을 통한 입체의 실험이 두드러진다. 1999-2006년 <Emptiness> 시리즈, 스테인리스 스틸에 도색을 통한 색채의 사용이 시도되고, 매스, 중량감의 최소화가 더욱 강조되어 평면에 가까운 형태의 입체 실현이 정점에 이르는 2007년 이후 <Space-Less>시리즈가 있다.
김인겸은 위의 연작들 중 마지막 <Space-Less>시리즈 조각 작품을 “Image-Sculpture”라 부르며 매스나 볼륨 즉, 덩어리감이 중심이 되는 전통적인 조각 어법에서 탈피한다. 마치 하나의 “Image”처럼 무게감을 상실하고 평면성이 강조되는 조형을 통해 입체를 실현하여, 입체적 감각이 평면적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재길은 이에 대해 “스페이스리스(Space-Less)에 나타난 김인겸의 조각은 착시와 공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 그의 이미지 조각(Image-Sculpture)은 과거 <묵시공간 Revelational Space>이나 건축적 프로젝트 작품처럼 인위적인 것이 배제된 형태 그 자체이며 […] 직접적인 공간표현에서 벗어나 감춰진 공간을 조형화하는 이미지 조각인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으며, 최은주는 “평면 위에 도면을 그리고 이를 오려내어 입방체를 만들고, 입방체를 다시 평면으로 돌려 놓는 수많은 반복 속에서 조각가로서 그를 평생 동안 지배해 온 무거운 돌과 쇠덩어리의 양괴감과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해석의 번잡스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Emptiness, 2004, Stainless-Steel and Stainless-Steel Mirror Black, Installation Dimension Variable © 작가,우손갤러리, 사진: Kim San
Emptiness, 2005, cor-ten steel, 234 x 62 x 53 cm © 작가,우손갤러리, 사진: Kim San
Space of Emptiness, 2000, steel, 60 x 69.5 x 13 cm © 작가,우손갤러리, 사진: Kim San
Space-less, 2016, acrylic ink on paper, 79 x 109 cm © 작가,우손갤러리, 사진: Kim San
작가가 ‘Image-Sculpture’ 작업과 동일시하며 ‘조각적 개념을 부여하고 해석’하는 평면작업은 일반적인 ‘그리기’ 개념을 조각적으로 확장시키는 동시에 그 역의 관계 또한 김인겸의 탐구 대상이 된다. 통상적인 펜이나 붓이 아닌 스퀴즈나 스펀지, 먹, 잉크 등을 이용한 작업은 도불 이전과 이후의 작업을 이어주는 키 역할을 하며, “Image-Sculpture”의 본원이 된다. 도불 이후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가운데 재료와 매체의 변화를 도모한 작가는 기존에 주로 사용하던 돌, 나무, 브론즈 등 무겁고 다루기 힘든 재료 대신 일반 종이는 물론 잡지, 신문지, 고서 등 각종 지류를 접고 자르고 다시 붙이는 작업과 함께 스퀴즈 등을 이용한 작업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조형 언어 개발에 집중한다.
김인겸 특유의 스퀴즈 작업에 대해 작가는 “Dessin de Sculpture”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데, 프랑스어 ‘de’는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로 ‘~의’로 번역되지만 영어의 ‘of’와 마찬가지로 동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Dessin de Sculpture”를 한국어로 옮기자면 “조각의 데생” 정도가 되겠지만, 그 의미는 “조각인 데생”이자 “데생인 조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작가에게 그린다는 것과 깎거나 붙이는 조각 행위는 동격의 것이 된다. 이는 1970년대부터 지속해온 조각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만개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종이 위를 가로지르는 스퀴즈에 묻은 먹과 잉크가 만들어내는 넓은 면과 이들의 중첩,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평면에 실현된 입체적인 형태와 공간은 스테인리스 스틸 판을 이용하여 납작하고 날렵한 면이 만들어내는 입체가 되어 벽에 걸리는가 하면, 전시장 바닥에 놓여 환영적 형태와 공간을 만들어내는 “Image-Sculpture”가 된다. 그의 <Space-Less> 조각 작업이 입체적 감각이 평면적으로 해석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평면 작업은 평면적 감각이 입체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면의 겹침에 의한 공간 형성은 장소 특정적이며 건축적인 설치작업에서 광대한 스케일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프로젝트-사고의 벽 Project-The Walls of Thought>(1992)은 현재 아르코 미술관인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공간 전체에 녹슨 철판을 이용하여 건축적 구조물을 구축하고는 곳곳에 문을 설치하여 마치 건물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 관람객이 작품 내외를 거닐면서 사유하며 ‘사고思考’의 심연으로 빠져들도록 하는 작품이다. 작품 곳곳에 벽감을 설치하고 초를 켜 놓아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촛농이 흐르는 대로 방치하여 시간의 흐름 또한 느낄 수 있게 한다.
세 번째 프로젝트 작업 – 두 번째 프로젝트 작업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프로젝트-메시지메 벽 X> (1994)가 있다. –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 <프로젝트21-내추럴 네트 Project21-Natural Net>(1995)는 앞선 작업의 육중한 철판과 달리 맑고 가벼운 느낌의 투명한 아크릴 구조물이 특징이다. 한국관의 나선형 계단 구조를 작품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계단 공간을 겹으로 둘러싸는 청보라 빛 아크릴 구조물 중간중간에 이어 컴프레셔가 설치된 물을 채운 수직 수조를 배치하여 물이 역동적으로 순환하도록 했으며, 2층에는 CCTV, 컴퓨터 모니터를 설치하여 관람객이 1층 구조물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2층 모니터 화면을 통해 자신의 이동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장치하여, 인공적인 구조물, 자연의 물, 하이테크 기기의 만남을 통해 제46회 베니스비엔날레 주제였던 “동질성과 이질성”과 조우한다. 청보라 빛 아크릴 판들이 나선형 계단을 둘러싸는 투명한 면의 중첩이 만들어내는 공간감은 이후 입체와 평면을 오가며 둘의 구분을 무색하게 하는 <Space-Less> 시리즈 조각과 평면작업을 예견한 것이었다.
우손갤러리에서 2025년 3월 개최되는 ≪Papier Sculpté, Sculpture Pliée/Sculpted Paper, Folded Sculpture≫전은 2005년 시공 갤러리 개인전 이후 대구에서 20년 만에 열리는 김인겸의 개인전이다. 2005년 시공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던 ≪Emptiness≫전은 김인겸이 1996년부터 파리에 머물며 제작한 작업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당시 시공 갤러리 이태 대표의 급작스런 작고로 지속되지 못했던 김인겸과 대구와의 인연을 2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열어본다.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으로 번역되는 본 전시의 제목 ≪Papier Sculpté, Sculpture Pliée/Sculpted Paper, Folded Sculpture≫는 프랑스 평론가 기 부아이에(Guy Boyer)글에서 착안한 것이다. 기 부아이에는 2001년 프랑스 파리 사이트 오데옹5 갤러리(Site Odéon5)에서 개최된 김인겸 개인전 ≪Emptiness≫전 서문을 통해 김인겸 작품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어떻게 종이로 된 2차원적 공간이 조각작품과 그것들이 놓여 있는 공간을 하나로 묶는 믿기지 않는 연결고리를 암시할 수 있을까? 이러한 그래픽적인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은 그가 1996년 파리에
정착했을 때 재료라는 조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조각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을 갖지 못했던 초기, 그는 먹으로 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 결국 그는 금속이나
사포로 문지른 강철 그리고 녹슨 강철의 효과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 먹색은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각을, 다른 한편으로는 빛의 반짝임을 나타내면서 누르는 정도에 따라 농담을 달리한다. 이러한 불투명과 투명의 유희로 3차원의 효과를 불러오며 […]
깊이와 무게 등 그의 대형 작품들이 지니는 특징들을 취하게 된다. 이 데생 된 종이들은 곡선과 사각형 그리고 접힌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 김인겸의 기하학적이며 볼륨을 갖고 있는 솜씨 좋은 설계도, 접힌 조각들 그리고 조각된 종이들은 파리의 갤러리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 부아이에(Guy Boyer)
본 전시에서는 2001년 파리 전시와 2005년 대구 전시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을 대거 재소환한다. 회화를 평면의 예술이라 할 때, 덩어리의 예술이라 일컬어 지는 전통적인 조각 개념에서 탈피하려는 김인겸의 실험은 초기 연작 <묵시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그가 주로 사용한 탈조각적 어법은 ‘조립 기법’이었다. 하나의 육중한 덩어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작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는, 흡사 목조 건물 건축법을 연상시키는 작법은 1980년대 조각계에 신선한 자극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묵시공간> 연작 이후 건축적인 설치작업 <프로젝트> 시리즈에서 본격적으로 구사된 면(面)을 기본 조형 요소로 채택한 작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김인겸 작업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는데, 1996년 파리 정착 직후부터 등장한 스퀴즈, 스펀지 등을 이용한 평면작업은 이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작업이다. 스퀴즈가 스쳐간 종이 위에 구현된 ‘탈물질적인 조각’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작업은 종이를 접거나 자른 듯한 형태의 녹슨 철판, 블랙 미러 조각의 강렬한 물질의 존재감과 대비되며 공명한다.
김인겸은 브론즈, 돌, 나무 등은 물론 강철, 스테인리스 스틸, 안료를 섞은 석고, 블랙 미러, 종이, 먹, 잉크 등 다양한 재료 실험을 통한 조각의 범주 확장을 꾀했다. 본 전시는 종이 평면 위에 먹과 잉크를 묻힌 스퀴즈를 통해 평면을 입체로 해석한 작업들과 마치 종이를 자르고 붙이거나 휘게 하여 홀로 설 수 없었던 면을 독립적으로 서있게 함으로써 면으로 해석한 입체라는 독특한 조각 어법의 구현이 돋보이는 2000년대 중반 조각 작업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과 더불어 거친 날 것의 질감이 두드러지는 강철, 녹슨 철판과 투명하게 빛나는 매끄러운 블랙 미러와 스테인리스가 지닌 물질성의 대비를 통해 강렬한 물질의 존재감 너머 ‘비어있음(Emptiness)’을 향한 작가의 행보를 선보인다.
강철과 블랙 미러 그리고 종이 평면 작업의 대비적인 구성과 더불어 1992년작 <프로젝트-사고의 벽 Project-The Walls of Thought>과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 <프로젝트21-내추럴 네트 Project 21-Natural Net>이 전시될 당시 영상기록물, 해당 작품들의 모형을 비롯한 아카이브 자료를 함께 선보여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가 핵심인 두 프로젝트의 현장감이 재현될 수 있도록 하였다.
본 영상과 모형 등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전 ≪모든 섬은 산이다≫(몰타 수도원, 베니스, 2024)에 출품되어 한국 미술계의 기념비적 사건을 회고하게 해 준 바 있다. 이러한 전시 구성은 1990년대 적극적인 분기점에 이어 2000년대에 이르는 김인겸 작업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파리에 머물며 기록한 김인겸의 작가노트는 본 전시 주요 작품들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어 줄 것이다.
작년 11월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에서 초청받아 파리에 온 이후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내가 말하는 이곳에서의 작품 활동이란, 곧 다른 사회에 적응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작품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작가에게 보다 큰 신축성과 유연성, 그리고 개별성을 요구하게 된다. 물론 자리도 다르고, 요구도 다르고, 욕구도 다르며, 다른 것들과 만나며 부딪힌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만들어진다. 내 경우 이것은 우선 손쉬운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려운 것부터 배워온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한 체험이다.
스튜디오엔 일상에서 얻어진 오브제들과 그것을 이용해 만든 재미있는 마케트(maquette)들, 그리고 조각 드로잉들이 쌓여져 갔다. 재료, 도구, 일손, 시간, 장비 등의 제약 속에서 그 제약이란 조건이 만들어낸 소프트한 작품, 그리고 작지만 큰 조각들이다.
요즘 나는 물감도 접고, 종이도 접고, 철판도 접는다.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 빈 공간을, 마음도 한쯤 접어놓고 텅 비어진 기분이다.
김인겸 (파리 퐁피두 스튜디오에서, 1997)
서문 제공 : 우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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