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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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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글 김솔지(더블데크웍스)


물에 가라앉은 나비 날개 가루


김혜나의 그림은 일렁이는 순간을 담아낸다. 그림은 두껍지 않다. 여러 층을 쌓아 올린 마티에르는 얕은 두께에도 두터운 층을 지니고 있다. 층 사이로 비치는 색상은 다채롭다. 세상이 수만 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듯, 수십 개의 유화 물감은 그리는 이의 팔레트에서 더 많은 색상으로 늘어난다. 복수의 물감 조합으로 새로이 만들어진 색상은 얕은 층 위에 안착하며, 마침내 알맞은 색으로 나타난다. 비교적 높은 채도의 색상 사이로 은빛이 바스러지듯 빛난다.


고유의 색상을 머금고 빛나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각각의 형상은 화폭에 조화롭게 어울려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자 한 대상은 있었을지라도, 그림에 그 대상이 직접적으로 모사되지 않는다. 물방울, 달걀, 사과 등, 제각각 동글동글한 형태로 그려진 객체들은 면으로 표현된 경계가 있으면서도 다른 형상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작가가 그렸다고 하는, 물에 가라앉은 나비 날개 가루는 이미지 어딘가에서 반짝거린다. 특정한 대상이 묘사되어 그려진 것이 아니므로, 역시나 화면 안에는 배경과 대상이 나뉘어 있지 않다. 투시법도 적용되지 않고, 다만 펼쳐져 있다. 배경과 대상 사이의 위계나 공간감을 재현하려는 왜곡은 없다. 


그렇다면 김혜나의 회화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녀가 색과 형으로 그려내는 이미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마주친 상황일 것이다. 이 상황들은 경계가 나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제각각 위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세계의 이치임을 담지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어제의 내가 당신과 붙어 있었다가 오늘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또는 새벽에 잠재의식에 들어있던 어떠한 기억이 오후에는 표면으로 내어져 오늘 나의 일상에 단단히 결속되는 것처럼. 유무형의 존재하는 것들과의 마주침은 멀어져 있던 것들을 앞으로 떠올려낸다. 변화하는 관계 사이에서 마주하는 풍경과 내 안에 담긴 기억을 포갠 마찰면을 색과 형으로 담아내는 김혜나의 그림을, 가까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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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연못에는 얼굴 45.5x45.5cm oil on canvas 2023ⓒ 작가, 이유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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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mas village oil on canvas 2023, 45.5 x 33.5cmⓒ 작가, 이유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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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hour 162x131cm oil on canvas 2023ⓒ 작가, 이유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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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20.5x27cm oil on canvas 2024ⓒ 작가, 이유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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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 91x72.5cm oil on canvas 2024ⓒ 작가, 이유진갤러리 



이미지 기억법


이유진 갤러리에서 열리는 김혜나 개인전 《log cabin romance》에는 10~30cm 크기의 소품부터 100호 내외의 대작까지, 김혜나의 다양한 크기의 추상회화 신작이 전시된다. 작은 그림의 형상은 큰 그림보다 구체성을 띤다. 사진으로 각인한 것 같은 순간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작은 그림에 담긴다. 김혜나는 자신이 기억하는 순간을 이미지로 재현하기보다는 그때 자신이 느낀 온도와 습도, 기분이나 감정, 촉각과 후각 등 시각 외적인 감각 요소를 종합한 하나의 심상을 화면에 기록한다.


작은 그림 중 하나인 〈공기놀이〉(2024)는 동글동글하게 깎인 조약돌로 공기놀이를 하고 놀던 어린 시절의 감각적 기억에서 나온 이미지이다. 아버지의 일로 제주도에 살던 그녀가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놀이재료를 가지고 놀던 기억은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인하여 그때의 감각과 함께 이미지로 담겼다. 〈still life〉(2023)는 어린 시절 받았던 인형이 주는 안정감을 지금까지 느끼고 있는 그녀가 동그란 형태들과 함께 구성한 그림이다. 〈lemon shower〉(2023)에도 동글동글한 형상이 가득하다. 동그란 형상에 있는 색색의 점들이 마치 눈과 코처럼 보이며, 표정을 지닌 어떤 생물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림의 제목처럼 레몬의 노란빛을 중심으로 초록빛과 보랏빛이 대략 12개의 동그란 형상을 지탱한다.

작가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특정한 경험은 추상화된 이미지로 전달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심상을 형성하도록 한다. 작은 그림에 표현된 구체적 순간들은 더 넓은 이미지 안에서 어떠한 질서로 구성된 형상들의 공간이다. 〈밤의 정원〉(2023)에는 다양한 푸른빛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들이 희고 노란, 그리고 옅은 연보랏빛으로 가득하다. 조개나 나비 날개와도 같은 둥그스레한 다각형이 제각각 화면에 떠 있다. 〈golden hour〉(2023)는 더 밝다. 다양한 색상 위로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들이 한데 모여 있다. 김혜나의 회화에서 색은 빛이다. 



죽음 혹은 부재를 다루는 추상회화


김혜나의 그림 중 딱 한 점, 〈glance〉에 그 심상을 끌어내는 이의 얼굴이 등장한다. 화초 뒤에 가만히 얼굴을 드러내고 앞을 응시하는 이. 이 눈이 바라본 풍경이 넓은 면으로 펼쳐진다. 김혜나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죽은 동물을 무두질하는 사냥꾼”이라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glance〉에 담긴 얼굴은 김혜나이자 사냥꾼이다. 김혜나의 회화는 시각적 기억을 중심으로 한, 자신이 받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자극을 내화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미지이다. 설명하자면, 작가의 유년 시절 경험은 사냥꾼이라고 하는, 어둡고 거칠 것 같은 존재가 수집한 이미지로 나타낸다. 작가는 어느 오두막에 살고 있다는 사냥꾼이 바라보았을 풍경, 사냥꾼이 집에 오던 길 밤의 풍경, 사냥꾼이 만난 여름의 풍경을 그린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스스로를 사냥꾼이라고 할까?

그녀는 이제는 떠나버린 것, 즉 지나버린 유년 시절, 생을 다한 반려견, 찰나일 뿐인 한 여름의 빛, 바닷속 조개의 반짝거림, 바구니에 담긴 과일의 아름다움을, 그녀가 접하는 순간의 풍경들과 접합하여 꺼낸다. 지금은 부재한, 기억으로만 현존하는 대상과의 로맨스이다. 그림으로 기록되는, 혹은 그리는 동안 지속되는 이 로맨스는 그녀 스스로 죽음을 소화하는 과정일 수도 있으며, 애틋하고 그립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행복감을 간직하는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를 수집하는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김혜나는 자신의 기억을 현재의 풍경들에 덧대어 하나의 이미지로 구성한다. 그 이미지를 채우는 것은 빛을 반사하는 만큼 빛나던 모든 대상, 그 대상들에 대한 그녀의 감각적 기억이다.

누군가를 사라지게 하는 사냥꾼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 버린 존재를 다시 붙잡는 그녀의 회화는 일순간 머무르는 존재를 아름다운 빛살에 반응하는 형상으로 추상화함으로써 영원히 반짝이게 한다. 마치 하나의 자연처럼, 실제로 그녀의 회화는 얕게 켜켜이 쌓아 올린 층과 이 층으로 인해 안정적으로 그 색을 발한다. 인공조명에서도, 자연광에서도 그녀의 그림은 저마다의 빛에 반응한다. 밝디밝은 빛에서나 노을 진 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빛에도 그녀가 그려낸 숲, 사냥꾼이 바라본 풍경은 조용히, 빛나고 있다. 



평론제공  이유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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