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숨결을 불어넣는 작가 김령 개인전 ‘합일지상合一之象 : 서사敍事를 응축한 오브제’ 개최
혜원아트갤러리, 10월 26일(목)부터 11월 30일(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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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아트갤러리는 10월 26일(목)부터 11월 30일(목)까지 작가 김령 개인전 ‘합일지상合一之象 : 서사敍事를 응축한 오브제’를 개최한다.
김령은 대학에서 프로덕트 디자인을 전공하고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서 가구 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은 디자이너이자 조각가다. 나무라는 소재에 부단히 천착해온 그는 목조 가구부터 생동감 넘치는 환조·부조 작업에 이르기까지 디자인, 공예, 순수미술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작업을 선보여왔다.
지난 전시의 성원에 힘입어 혜원아트갤러리와 두 번째로 조우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나무 소재가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과 전통 도자기의 단정하고 유려한 형상을 빌어 자연과 인간의 지속적 관계, 그 동일성의 서사를 담은 최신작들을 선보인다. 과열된 현대 사회에 피로를 느끼고 있다면 담담히 자연과 생명의 서사를 목도하게 하는 김령의 작품들과 함께 가을의 여유를 느껴보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에는 오랜 시간을 응축한 강인한 생명력이 내재돼 있으며 이는 곧 ‘나무’의 소재가 지닌 성질과 ‘선(線)’, 도자기의 ‘형상(形狀)’이라는 조형 요소가 지닌 독특한 특성을 통해 드러난다. 작은 씨앗이 발화해 무수한 풍파를 겪은 뒤 우뚝 선 나무는 생명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재료 상태의 나무는 뿌리를 내린 대지로부터 잘려 나가 생명력을 소실한 체 작가의 손에 주어진다. 작가는 거대한 나무를 조각내고 가느다란 목봉 형태로 가공한 뒤 이를 다시 켜켜이 엮어 백자, 청자, 막사발 등 전통 도자기의 형태로 깎거나 파내어 다듬는 지난한 작업의 과정을 수행한다. 이 같은 작가의 인위적 개입 행위는 이미 죽은 나무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하고, 작품이라는 숨결을 다시금 불어 넣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질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순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환생하게 하는 것이다.
김령, 91×116.8×5(50F)㎝, acrylic on wood, 2023 (사진=혜원아트갤러리)
김령, 60.6×60.6×5(20s)㎝, acrylic on wood, 2023(사진=혜원아트갤러리)
김령, 91×98×8㎝, walnut wood, 2023(사진=혜원아트갤러리)
‘기억’
나무에 새겨진 결과 나이테, 그리고 나무의 굳은살인 옹이 등의 흔적은 나무가 살아온 환경과 시간을 아로새긴 생애의 기억이자, 그 안팎을 가득 메운 현존(現存, Present) 자체다. 김령은 과거의 기억을 온몸에 새긴 나무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오버랩시킨다. 철학자 존 로크는 자아의 모체인 인격이 시간과 경험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며, 여기서 기억이 인격 동일성의 중심축이라 간주한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자신의 경험과 회상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리적·정서적 환경,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 영향받는 인간에게 과거의 기억은 곧 결이자 나이테, 옹이이며 이것으로 가득 찬 나무의 생애는 기억과 경험, 회상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는 인간의 삶과 동일선상에 놓인다.
“나무: 색, 결, 무늬 그리고 외형. 시간의 퇴적물로 쌓인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가 지내온 시간을 짐작하고 느낄 수 있다. 흘러간 것에 대한 기억. 온도, 습도, 그리고 시간의 기록. 그리고 그 추억이 향수가 된 듯 나무는 뿌리로부터 잘렸음에도 끊임없이 조용하고 잔잔하게 움직이고 뒤틀린다.” -작가 노트 중-
‘결’
작가는 단단한 성질에 결이 선명하고 화려한 물푸레나무를 깎아 가느다란 선형의 목봉들을 만들고 이것을 엮어 도자기 형태로 다듬는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사방으로 뿌리와 가지를 그물처럼 뻗어가듯 작품 몸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선(線)들은 만남, 교차, 갈라짐으로 엮어져(Woven line) 조화로운 결을 이루고 작품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각 개인의 삶이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과 결의 형태에 입각한 김령의 오브제 작업은 맺어지고 이어지며, 끊어지는 다양한 관계의 유형들이 켜켜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관계의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 그리고 타자와 관계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 그 보이지 않는 얽힘을 시각화하기 위해 기용한 형식인 것이다.
“다른 면의 선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하나의 큰 실루엣으로 만난다. 그 선들 속에서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나무의 간결하면서도 시름이 얽혀 있는 아련한 향기를 그리고 있다… 천천히 들여다보면 나무만큼 그 생명이 살아온 기억이 느껴지는 것이 있을까. 주변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나무는 달라진다.” -작가 노트 중-
‘합일(合一)’
인간이 영혼을 담는 그릇에 비유되듯, 작가는 도자기가 지닌 ‘용기(Container)’라는 특성과 형상에서 발견되는 동일성에 주목한다. 시간과 영혼을 담아내는 것은 물론 외적 형상의 면에서도 이들은 서로 닮아있다. 또 처음의 도자기는 표면이 매끈하고 반짝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흔들이 생기고 최초의 빛은 점차 깊고 그윽한 광택으로 변모된다. 인간의 생장 또한 시간·기억·경험의 축적이 각 개인을, 존재를 완성해가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나무를 깎아 만든 양각, 반대로 나무를 파내어 음각으로 조각한 다양한 도자기 형상은 공간을 비우고 메우는 대응 관계에 놓이게 한다. 부재와 실재는 존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존재의 흔적을 의미하는데, 김령은 이런 작업을 통해 현존은 채움으로써 증명되는가, 비움으로써 증명되는가와 같은 보편적 생명에 대한 존재의 의미를 고찰한다.
“나의 작업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실체와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무수한 물질들에 둘러싸여 감각을 통해 인지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공기와 같이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내 공간 안에 있을 물질 같은 것들은 특별한 나의 인식 없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세상에 존재한다고 느낀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공기와 같은 것들을 다른 이들도 나와 똑같이 인식할까.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에서 모두 똑같이 인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인식하는 물질이 완전함이 아닌 파편이라면 과연 그것의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 노트 중-
조각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명주의적 예술관, 그리고 예술 행위를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의 전통적 예술관에 뿌리내린 김령의 조형언어는 관람자에게 고요한 생동을 목도하게 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무수한 목봉으로 해체됐다가 새로운 작품으로 재결합되는 물리적 전개 과정은 세포가 분열해 하나의 개체를 이루고 스스로를 소진하다가 다시 새로운 생명을 배태하는 순환적 생명 현상을 상기시키는 것으로써 말이다. 이처럼 김령의 모든 조형 행위는 숨을 불어 넣는, 즉 생명의 서사를 기록하는 행위이자 그 의미의 가시화로 귀결된다. 오늘 우리는 김령의 캔버스 위에서 ‘생의 약동(élan vital)’ 그 시각적 구현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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