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치플럭스(H-flux) 갤러리는 3월 14일부터 4월 19일까지 싱가포르 작가 제레미 히아(Jeremy Hiah)의 한국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히아는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현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작업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예술의 경계를 확장해 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일장춘몽(一場春夢, A Fleeting Dream)을 주제로 동양과 서양 사상을 융합하여 존재와 의식의 문제를 탐구하는 신작 회화 및 판화 약 20점을 선보인다.
히아는 신화, 토속신앙, 그리고 현대 사회·정치적 문제를 통해 인간 존재와 사회 구조 속 개인의 존재 방식을 탐구해 왔다. 어린 시절, 신과 소통하는 젊은 ‘영매’였던 친구를 따라 도교의 영매 문화에 심취했고, 이후 도교의 근본 철학과 도가 사상을 깊이 탐구하게 되었다. 특히 장자의 『호접지몽』과 카프카의 『변신』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그는, 존재의 불안정성과 변신(metamorphosis)을 핵심 주제로 삼아 이를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한다. 그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이 겪는 실존적 불안과 소외를 조명한다.
그의 작업 방식은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매체로 변주하고 확장하며, 사회적 모순과 권력 구조 속에서 인간 존재의 유동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다다이즘(Dadaism)과 플럭서스(Fluxus)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질서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의 풍자와 유머, 오브제의 활용, 그리고 관객 참여적 퍼포먼스는 기존 의미를 전복하고 예술과 삶을 통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제레미 히아 개인전 일장춘몽(一場春夢, A Fleeting Dream) 전시전경 © 작가, Femiosis Art Therapy Studio
제레미 히아 개인전 일장춘몽(一場春夢, A Fleeting Dream) 전시전경 © 작가, Femiosis Art Therapy Studio
제레미 히아 개인전 일장춘몽(一場春夢, A Fleeting Dream) 전시전경 © 작가, Femiosis Art Therapy Studio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회화 Blame the Sky, Blame the Earth, Don’t Blame Yourself는 1994년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남성을 묘사한 작품에서 출발했다. 이후 이 주제로 2008년 메콩강 퍼포먼스를 거쳐, 돈에 머리를 파묻은 겁쟁이 (The Coward) 판화 시리즈로 이어지며 현실 도피와 돈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했다. 작가는 “겁쟁이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는 자”라고 언급하며, 인간이 실재라고 믿는 것은 사실상 허상(Illusion)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인간이 집착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The Asia Garden of Earthly Delight에서 히아는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천국, 지상, 지옥’을 주제로 대형 드로잉을 제작했다. 작품에는 문어 같은 형상의 미래 우주선과 초현실적인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퍼포먼스 아티스트, 건축물, 신화 등 동서양의 문화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보스가 도덕적 우화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타락을 풍자했다면, 히아는 신체의 변형을 통해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와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소외되는지를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동양의 노장사상과 서양의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인간 존재와 사회적 구조를 탐구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히아에게 변신(metamorphosis)은 사회적 억압과 개인의 정체성, 그리고 권력 구조 속에서 존재의 유동성과 순환성을 내포한다. 보스의 기괴한 상상력과 도가적 세계관이 결합된 그의 작품에서는 돈과 권력, 사회적 질서가 한낮 꿈처럼 여겨지고, 현실과 허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의 작품 1Dies, 1000 Grow에서처럼, 작가에게 ‘일장춘몽(一場春夢)’은 허무주의적 사라짐이 아닌, 끊임없이 순환하는 존재의 흐름을 의미한다.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한바탕의 봄꿈처럼 사라지지만, 소멸이 곧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변화의 시작임을 암시한다. 히아는 이러한 순환 속에서 익숙한 것들을 낯설고 기괴하게 만들며, 변화 속에 놓인 인간 존재의 자유를 사유하게 한다.
제레미 히아(Jeremy Hiah, 1972, 싱가포르)는 싱가포르 라셀 예술대학(RMIT/LaSalle-SIA)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독창적인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작품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호주, 태국, 한국, 덴마크 등 세계 각지에서 전시되었으며, 다수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Singapore Art Museum),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National Gallery Singapore), 태국 ASIATOPIA 재단, 일본 AIR 3331, 싱가포르 외교부(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Singapore)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2023년에는 20년에 걸쳐 완성한 펜-잉크 드로잉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로 2023 UOB Painting of the Year (Singapore)를 수상하며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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