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색에 물들다 지쳐버린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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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유림 (비작(주) 대표 / 작가, 예술교육콘텐츠 기획자)
오늘의 그림책 : 레오 리오니, 『자기만의 색』 (시공주니어)
어른으로 산다는 건, 어쩌면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색의 옷을 갈아입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치열한 일터에서는 빈틈없는 얼굴을 하고,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때는 다부진 태도를 취합니다. 때로는 갈등을 피하려 한껏 몸을 낮추고 투명해지기도 하죠. 상황에 맞춰 나를 조율하는 것은 험난한 일상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우리가 택한 최선의 생존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쉴 새 없이 주변에 나를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 깊은 피로와 무기력이 밀려옵니다. 너무 오래 남들의 기대에 맞춰 색을 바꾸다 보니, 정작 내 안의 진짜 목소리는 길을 잃어버린 겁니다. 문득 거울 앞에 섰을 때 서글픈 마음으로 묻게 되죠.
'이 수많은 모습 중에,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자기만의 색』에 등장하는 꼬마 카멜레온의 고민도 이와 꼭 닮아 있습니다. 돼지는 분홍색, 코끼리는 회색처럼 다들 자기만의 색이 있는데, 카멜레온만은 머무는 곳에 따라 쉴 새 없이 색이 변합니다. 레몬 위에선 노랗게, 호랑이 곁에선 호랑이 무늬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이 카멜레온은 견딜 수 없이 슬펐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세상에 맞추느라 소진되어 버린 우리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이미지 출처: 자기만의 색 (시공주니어)
세상엔 나의 정체성을 지켜줄 안전한 곳을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만의 색을 갖고 싶었던 카멜레온은 한 가지 묘안을 냅니다. 가장 푸른 잎사귀 위에 올라가 평생 그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죠. 우리 역시 종종 이런 선택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정체성 하나를 찾거나, 가장 안정적일 것 같은 역할 하나에 나를 단단히 묶어두려 애를 씁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었습니다. 계절이 바뀌자 푸르던 잎은 노랗게, 이내 붉게 물들었고, 마침내 마른 잎이 바스라져 떨어지던 날 카멜레온도 함께 어두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삶에서 억지로 하나의 고정된 자리를 움켜쥐는 것으로는 결코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음을 뼈아프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미지 출처: 자기만의 색 (시공주니어)

이미지 출처: 자기만의 색 (시공주니어)
변하지 않는 색 대신, 나란히 걸어주는 연대
춥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낸 카멜레온은 봄이 오자 지혜로운 늙은 카멜레온을 만나 묻습니다.
"우리는 영영 우리만의 색을 가질 수 없는 걸까요?"
늙은 카멜레온은 '단 하나의 고정된 색'을 찾아주는 대신, 다정하게 곁을 내어줍니다.
"우리, 함께 다니자. 그러면 가는 곳마다 색이 변하겠지만, 너와 나는 항상 같은 색일 거야."
두 카멜레온은 함께 풀밭으로, 모래밭으로 걸어갑니다. 여전히 주변에 따라 끊임없이 색이 변하지만, 둘은 늘 서로와 같은 색으로 빛납니다. 그제야 꼬마 카멜레온은 편안해집니다. 내 정체성을 지켜주는 진정한 안정감은, 홀로 굳건하게 하나의 색을 고집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와 나란히 삶을 통과하며 서로의 변화를 기꺼이 안아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죠.
모든 시간은 나를 나답게 물들였다
우리는 흔히 내게 덧입혀진 역할들을 다 벗겨내야만 가장 순수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앙상하지 않더군요.
수없이 다른 색으로 변해야 했던 시간들은 진짜 나를 잃어버린 실패의 기록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버티던 나도,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던 나도, 때로는 지쳐 무기력하게 침묵하던 나도 모두 지금의 나를 이루는 소중한 겹입니다. 정체성이란 결코 변하지 않는 단일한 색이 아니라, 삶의 계절을 통과하며 층층이 쌓여온 눈부신 축적물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변하지 않는 나의 색은 무엇일까'를 묻는 대신, 이제는 다르게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변화를 통과하며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그 수많은 색깔들은 나를 얼마나 다채롭고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는가.
오늘 당신이 띠고 있는 그 빛깔은 나를 지워낸 결과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남고 적응해 온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수많은 삶의 계절을 지나며 층층이 물들어 온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떤 스펙트럼 위에 서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