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어 보이는 나의 조각들이 나를 구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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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유림 (비작(주) 대표 / 작가, 예술교육콘텐츠 기획자)
오늘의 그림책 : 레오 리오니, 『프레드릭』 (시공주니어)
어른이 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걸리는 병이 하나 있죠. 바로 '생산성 강박'입니다.
쉬는 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요. 남들은 다 저만치 달려가며 자기 창고를 착실하게 채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덜컥 불안해지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책을 펴거나 일거리를 찾곤 합니다. 당장 돈이 되거나 스펙이 되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쥐고 있지 않으면, 내 쓸모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일 거예요.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을 읽다 보면, 꼭 내 안의 그 불안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해집니다.

이미지출처: 프레드릭 (시공주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식을 모으는 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들쥐 가족들은 겨울을 대비해 밤낮없이 일합니다. 옥수수도 모으고, 밀도 모으면서 부지런히 땀을 흘리죠. 그런데 딱 한 마리, 프레드릭만은 예외입니다. 남들 다 뼈 빠지게 일하는데 혼자 햇살이 내리쬐는 바위에 가만히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거든요.
참다못한 쥐들이 핀잔을 줍니다.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
프레드릭은 억울하다는 듯 대답해요.
"나도 일하고 있어.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고, 색깔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으는 중이야."
아마 다른 쥐들 속은 터졌을 겁니다. 당장 먹고사는 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니까요. 세상의 잣대로 보면 프레드릭은 영락없는 '게으른 몽상가'일 뿐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엉뚱한 상상력이나 돈 안 되는 취미들을 '다 쓸데없는 짓'이라며 꾹꾹 눌러 담고 살아왔잖아요.
하지만 진짜 춥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을 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미지출처: 프레드릭 (시공주니어)

이미지출처: 프레드릭 (시공주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마침내 빛을 발할 때
처음엔 모아둔 양식을 먹으며 버텼지만 결국 창고는 텅 비고 맙니다. 매서운 추위와 잿빛 우울감이 덮쳐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때, 쥐들은 프레드릭을 떠올리죠.
"네가 모은 양식들은 어떻게 됐어?"
프레드릭은 눈을 감고 자신이 모아둔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합니다. 프레드릭이 들려주는 금빛 햇살 이야기를 듣자 신기하게도 얼어붙은 몸이 따뜻해지고, 붉은 양귀비꽃과 파란 무 이야기를 듣자 잿빛 겨울에 잃어버렸던 아름다운 색채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마지막으로 멋진 시를 읊어주었을 때, 쥐들은 환호하며 말하죠.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버려진 것 같은 시간도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창고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삶에 깊은 번아웃이 찾아오고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을 때, 꽁꽁 얼어붙은 나를 다시 숨 쉬게 하는 건 통장에 찍힌 숫자나 이력서의 한 줄이 아니더라고요.
아무 쓸모 없어 보였던 나만의 엉뚱한 취향, 멍하니 하늘을 보던 시간, 끄적여뒀던 일기장, 남몰래 간직했던 예술적인 조각들. 당장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내 영혼을 살찌우는 그 '보이지 않는 양식'들이 결국 삶의 겨울에 나를 구원합니다.
남들처럼 개미같이 일하며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사람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곁에 있는 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햇살과 색깔'을 모으는 사람 역시, 세상엔 꼭 필요해요. 당신이 멍때리고, 방황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그 모든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다가올 삶의 겨울을 위해 나만의 고유한 예술을 부지런히 모으고 있던 치열한 시간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세상의 잣대로 당신의 쓸모를 함부로 재단하며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당신의 창고를 가만히 열어볼까요? 남들 눈엔 당장 쓸데없어 보일지 몰라도, 당신이 남몰래 꾹꾹 모아둔 당신만의 '햇살과 색깔'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