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는 2024년 2월 1일부터 3월 3일까지
김홍석 작가의 개인전 《실패를 목적으로 한 정상적 질서》를 진행한다. 지난 20년간 다양한 형식과 매체로 사회, 문화, 정치, 예술에 나타난 서구적 근대성과 이에 대한 비서구 문화권의
주체적 저항 사이의 모호한 인식 질서를 비판해 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뒤엉킴(entanglement)’에 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서구 모더니즘을 학습하고 모방할 수밖에 없던 비서구권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유체계는 혼돈과 잡종성의 개념을 통해 스스로 주체화 되었다고 선언하는 듯했으나, 결국 경계의 공간에서 다시 길을 잃곤 하였다. 경계의 개념이 현실적
대안이 되지 못했고, 또 다시 모더니즘적 사고에 갇히고 만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발견되는 미술의 방향은 거대함과 사소함, 자본과 아방가르드의 충돌을 향해 있으며, 이러한 대립구조에서 자본이 승리하는 듯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서구 모더니즘의 승자가 자본과 금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미술도
이것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탈구조주의의
'해체이론'이 결국 현실에 실현되지 못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이원적 대립이 아닌 현대에서 발견되는 뒤엉킨 감각은 어쩌면 새로운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기존의 인식, 즉 아름다움, 완전함, 옳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이런 뒤엉킴을 통해 우리의 인식체계를 바꾸어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것은 어떨까?
국제갤러리 K2 1층 공간의 작품들은 대중이 흔히 학습해 온 당연한 정보들이 통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껍고 무거운 재질로 제작된 슬리퍼,
조커의 얼굴을 한 고양이, 찌그러지고 구겨진 거대한 별…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발견되는 요소를 작가의 손길로 해체하고 낯설게 만든다. 특히, 조커의 마스크를 쓴 고양이는 작가의 개인사가 담긴 작품이다. 초등학생
딸이 원하여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는데, 딸이 고양이의 양육법에는 정통하지만 정작 고양이와는 친하지 않더라는 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서구를 흠모하고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막상 그들은 우리를 배척하는 느낌과 비슷했다고 작가는
밝혔다. 전체적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는 관람객에게 생소한 느낌을 주기도하는 상당히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있다. 작가는 이를 실재-허구, 정상-비정상, 옳고-그름의 대립항들이 뒤엉킨 상태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진정한 현대성, 즉 보편적 개념에 얽매이지 않은 완전한 자유로움이라고 설명한다.
K2 2층에는 사군자 페인팅을 필두로 연꽃, 대나무, 잡목
등을 그린 회화 작품들이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사군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먹을 옅고 진하게 표현하여, 부드럽고 생동감있는 방식으로 작가의 감정과 개성을 나타내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두터운 마티에르(matière)를 활용하여 동양의 군자(君子) 정신과 태도를 서구 모더니즘의 개념으로 지워버리고, 현대 동양인의
정신분열적 물질성을 보여준다. 동양화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탈피하기 위해 그에 대항하는 개념인 서양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아크릴과 캔버스를 재료로 삼아, 작가는 다시 한번 '고착화된
개념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전시 주제를 강조한다. 또한 연꽃, 대나무, 잡목 등을 표현한 회화에서도 각 식물들에 내재된 의미는
없으며, 이는 회화의 화면구성을 위해 채택된 주제들이다. 이렇게
내재성과 함축적 의미를 모두 제거한 작품에는 순수형태 그대로의 본질만이 오롯이 남게 되고, 구체적인
목적 없이 그려진 대상들은 오로지 화면의 구성(비례, 균형, 리듬, 통일, 조화)을 위해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믿음의 오류 (운석), 2024, Resin and stainless steel, 150×180×160cm (사진=한지수)
진정한 사랑, 2024,aluminum, chrome paint, and water-based urethane paint
147 x 140 x 80 cm (사진=한지수)
실재 악당, 2024, Resin61(h) x 27 x 20 cm(사진=국제갤러리)
동시에 전시장 내부에는 공공장소에서 흔히 들리는 음악에서 착안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온다. 작가는
어릴 적 백화점에서 들었던 조용하면서도 세련된 음악의 존재를 인식한 후로 줄곧 기차역, 공항, 쇼핑몰과 같은 공적 공간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대중적인
배경음악은 관람객의 무의식에 도달해 갤러리가 고급스럽고 특수한 곳이 아닌 공공적 공간임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게다가 작가는 개인적으로 블루스, 컨트리, 재즈, 일렉트로닉 등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좋아하며 작업할 때 주로
듣는다고 한다. 따라서 관람객들이 사군자 페인팅과 이 배경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이지는 모르겠으나 작가
본인에게는 전혀 어색하지 않고 친숙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사군자’라 명명한 작품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사군자 회화이다. 총 4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시 배열을 동양적으로 하지
않았다. 더구나 앞서 언급한대로 한지가 아닌 캔버스에 사군자를 그렸다.
나는 곧 60세가 되지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동양 미술을 실습할 기회가 없었다. 미술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의 산업, 사유의 혁명이 일어난 후 서구는 모든 종류의 산업과
사유체계를 정립했다. 독일 유학 시절, 내 눈을 뜨게 한
교수의 질문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서구 미술에 더 깊숙이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내게 한 조언은 “너는 한국적 현대미술을 보여주어야 한다.”였다. […] 그러나 나는 한국적 정체성보다는 사회적 문제와 미술의 효용과 역할에 관심을 쏟고 싶었다.
[…] 이번 전시에서는 내 작품이 존재하는 공간이 지하 쇼핑몰 또는 한적한 지하철 역과 별다를 바 없기를 바란다. 즉 미술이 특수하거나 특별하다고 느끼는 감상자의 마음에 균열을 내는 경험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K3에는 앞서 본 두 공간에 비해 다소 유쾌한 광경이 연출된다. 전시장 중앙에는 천장을 뚫고 바닥에 떨어진 듯한 거대한 운석 덩어리가 관객을 압도하는데, 의도치않게 생겨난 이 엄청난 덩어리는 중력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깨진 모습이다. 갈라진 형태 사이로는 지구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불문율적으로 합의한 '별'이라는 기호를 띤 두 개의 물체가 관찰된다. 김홍석은 이번 개인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리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의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표현해 기존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미술가의 책임이며 ‘미술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처럼 작가는
한때는 별이었으나 현재는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 본체와, 그 내부에 보이는 별의 표상의 조화를 통해
실재적 존재와 해석적 존재의 개념을 뒤엉키게 만든다.
김홍석(b.1964)은 서울 출생으로 1987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상명대학교 무대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국내외 주요 기관에서 꾸준히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져왔다. 주요 전시로는 서울시립미술관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2023), 스페이스 이수 《속옷을 뒤집어 입은 양복과 치마를 모자로
쓴 드레스》(2023), 부산시립미술관 어린이갤러리 《많은 사람들》(2023),
문화역서울284 《나의 잠》(2022),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2019 타이틀 매치: 김홍석
vs. 서현석' 《미완의 폐허》,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변용하는 집》(2018),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달의
이면》(2017), 삼성미술관 플라토 《좋은 노동 나쁜 미술》(2013),
도쿄 모리미술관 《All You Need is LOVE》(2013),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2》(2012), 아트선재센터
《평범한 이방인》(2011) 등이 있다. 오쿠노토 트리엔날레(2017), 난징 국제 아트 페스티벌(2016),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14), 광주비엔날레(2012), 리옹비엔날레(2009), 베니스비엔날레(2005, 2003) 등 다수의 대형 국제전에도
참여했다. 작가의 작품은 현재 미국 휴스턴 미술관, 캐나다
국립미술관, 호주 퀸즈랜드 미술관, 프랑스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르 콩소르시움, 일본 구마모토 미술관과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을 비롯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포스코미술관 등 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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