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살아있는 우리집, 아브라함 끄루즈비예가스(Abraham Cruzvilleg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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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머리 자른 데에 거창한 의미는 없어요. 파리로 이사했을 때 머리가 너무 시려서 기르기 시작했던 거였으니까요.”
머리를 자른 데에 어떤 의도나 내밀한 의미가 있었는지 묻는 양혜규 작가에게 멕시코 태생 설치 예술 작가 아브라함 끄루즈비예가스(Abraham Cruzvillegas)가 한 대답입니다. 앙 다문 입에서 짓궂은 유쾌함을 흘리는 그는 이어 말합니다.
“베를린으로 이사했을 때는 샴푸도 비싼 데다 변화를 주고 싶기도 해서 머리를 잘랐어요.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굉장히 중요해요—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끌어 내는 거예요.”
변화는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뜻하죠. 얼음이 햇빛에 녹듯 그 상태가 알아서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우리가 새로운 조건에 반응하거나 그와 일종의 대화를 나누며 시작돼요. 이때 ‘반응(reaction)’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수동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편 ‘이야기’는 그런 조건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 시작할 수 있죠 (물론 어떤 조건이 이야기에 불을 확 당기는 촉매가 될 수는 있겠지만요).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새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새로움을 느끼고 싶을 때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건 우리를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자유롭게 해요. 그 심리적 자유로움은 무언가를 스스로 만드는 데에 물리적 자유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을 더하고요.
자신이 가진 조건이 바뀌길 기다리는 대신, 끄루즈비예가스는 이 추진력을 신나게 활용해 새로운 것을 뚝딱뚝딱 지어 나가요. 멕시코시티 꼴로니아 아후스꼬(Colonia Ajusco)에서 작가의 가족이 손수 지어 살았던 집도 그렇게 스스로 “이끌어낸” 변화 중 하나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집은 그 안에 들어가 살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짓는 것이 아니라 건설사가 번듯하게 지어서 얼굴 없는 다수에게 한꺼번에 제공하는 상품이 되었어요. 자연히 건설 비용을 최대로 절감하는 효율성과 건설사의 이윤을 최대화할 수익성(그 주거 건물이 들어설 지역 부동산 값에 크게 영향을 받곤 하죠)이 살 사람 개개인의 삶의 특성을 대체해요.
디자인과 건축 과정 모두에서 비용을 낮추는 방법 중 하나는 내부 디자인을 통일하는 것이죠. 공간 딱 하나만 설계해서 컨트롤 V를 하면 되니까요. 아파트 실내를 보면 대개 비슷비슷하잖아요. 네모난 거실과 방이 있고, I자 혹은 L자 형 주방이 있고, 흰색과 베이지의 스펙트럼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 익숙한 무늬의 벽지와 강화마루가 모든 공간에 쓰이고.
그렇게 찍어낸 집이 수명을 다하면 그 안의 자질구레한 삶 (손바닥 기름이 묻은 벽, 실리콘 마감이 떨어진 싱크대와 벽 이음새, 스크래치가 난 화장실 거울)과 시간을 입은 자재들은 단 10초만에 쓰레기가 되어 폐기되죠.
집을 짓고 고치고 다시 짓는 일은 이제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절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변화가 되었어요. 집은 내 몸을 더위와 추위를 비롯해 예측할 수 없는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말이예요.
“자가건축(Autoconstrucción)” 혹은 스스로 짓기.
끄루즈비예가스는 다시 집을 스스로 만들자고 합니다.
작가에 따르면 스스로 짓는 과정은 “철저하게 미완성 상태이고 비효율적이고 불안정하고 정서적이고 감정적이고 기뻐 날뛰고 즐겁고 긍정하고 땀에 젖고 파편적이고 경험적이고 취약하고 행복하고 모순적이고 고독하고 외설적이고 관능적이고 형체가 없고 따뜻하며 헌신적”이예요.
이 기다란 수식어 조각들을 가만히 뜯어보면 거대 자본이 지어서 전시하는(살 돈이 없다면 ‘제공하는’이란 말도 무의미하죠) 집에 달릴 법한 것들과는 정확히 반대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럴듯한 아파트는 “철저하게 완성”되어야 하고 “효율적”이며 거주자가 몇 번이고 바뀔 상황을 예상하기에 누군가의 사람 냄새가 남으면 안 돼요. 그러니 들고 날뛰는 “감정”보단 어느 정도 대체 가능하게 평균적인 이성의 미학을 추구할 거예요 (모든 아파트 내부가 소위 모던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통일되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어요).
무엇보다도 비개인적이며 이성적인 아파트는 “관능적”이거나 “따뜻할” 수 없어요.
두 수식어는 몸과 몸이 맞닿을 때 이는 몸과 마음의 불씨를 전제해요. 몸의 들끓는 필요가 아닌 자본의 메탈릭한 계산이 만들어 낸 아파트에 그런 불잉걸이 살 리 없겠죠. 끄루즈비예가스가 스스로 짓는 모든 것은 변덕스럽고 비효율적인 몸이 지닌 온기와 그 온기에서 나오는 입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았던 입김이 희한하게도 남기는 흔적을 소중하게 다뤄요.
위 영상에는 아후스코에서 도시 이주민의 열악한 주거 환경과 구조적 빈곤 문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작가의 어머니와 그런 현실에 느긋한 예술적 유쾌함으로 대응했던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 과정에서 마치 아직 공사 중인 듯 보이거나 온갖 이질적인 자재들로 알록달록한 아후스코의 집들이 책갈피처럼 삽입돼요. 창문 모양이 전부 다르고, 옥색으로 칠해진 벽 한 켠은 돌무더기를 쌓아 올린 다른 한 켠과 맞닿아 있고, 새로운 방을 만들려는 듯 옥상에는 철근이 솟아 있어요. 작가의 어머니가 앉아있는 끄루즈비예가스 가족의 집에서도 울퉁불퉁한 벽과 평평하지 않은 마당이 보이고요.
앙헬레스 푸엔떼스와 로헬리오 끄루즈비예가스는 1960 - 70년대에 멕시코시티에 일었던 도시 이주 붐과 시스템의 도움 없이 오직 주민들이 일궈냈던 고단한 정착 과정을 온 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자기 몸뚱이만 겨우 가져왔던 이주민들은 문자 그대로 관리되지 않은 빈 땅이었던 멕시코시티 이곳 저곳에 일종의 정착 프로젝트 커뮤니티를 형성해요. 건축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이들은 서로의 몸과 심정적 유대감에 의지하며 버려진 돌과 나뭇조각, 공사장 폐기물을 모아 집을 짓고, 수도 시설을 만들고, 생활하면서 새로운 필요가 생길 때마다 무언가를 빼거나 더해갑니다. 자본도, 정부의 도움도 없이 커뮤니티의 힘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