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명상하는 거예요, 카위타 바타나쟌쿠르(Kawita Vatanajyankur) > 김나영의 "남"이 그리는 이야기 (Picture "Other" Lives by Na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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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의 남이 그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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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명상하는 거예요, 카위타 바타나쟌쿠르(Kawita Vatanajyankur)

본문

 

 


머리에 길다란 흰 실타래를 뒤집어쓰고, 피부와의 경계가 모호한 옅은 베이지 색의 리오타르를 입은 여성이 거꾸로 들려 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손이 이 여성의 골반을 붙잡고 새빨간 액체가 든 대야에 여성의 머리를 집어넣습니다. 얼굴이 푹 잠길 때까지. 그리고 뺍니다. 


집어넣고 빼기를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흰 타래가 빨갛게 물들 때까지. 



퍼포먼스 및 비디오 아티스트 카위타 바타나쟌쿠르(Kawita Vatanajyankur)의 작품 『염색』(Dye)을 끝까지 보려면 배에 힘을 꽉 주어야 해요. 7분 42초 간 누군가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처럼 산뜻한 경험이 아니니까요. 




『염색』(Dye), 2018 (이미지 출처: 카위타 바타나쟌쿠르 Vimeo)


‘고문 포르노’라고 하잖아요. 고통으로 뒤틀리고 경련하는 누군가의 몸을 지켜볼 때 내 몸에 저릿하게 흐르는 전율과 흥분을 일컬을 때요. 물론 그 누군가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입김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공간에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가능한 일이죠.


그리고 또 하나, 나를 흥분시키는 저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해소해 주길 호소하지는 않되, 자신의 고통이 나를 흥분시킨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음을 은밀히 드러내야 해요. 저 사람과 내가 어떤 힘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이 폭력에서 스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예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저 존재를 내가 장악하고 있음을 상대와 내가 모두 인지하고 그 긴장 상태가 조용히 유지될 때, 나는 그 힘의 우위에서 쾌락을 느끼게 되죠. 



그렇기에 힘을 가진 나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저 사람이 나에게 맞서는 것도, 내 모습이 저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도 아닌 저 사람과 나를 연결하는 힘의 관계 자체가 사라질 때예요. 



예를 들어 마치 돌처럼 저 존재가 내가 가하는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면요? 저 존재가 나를, 그리고 나의 힘을 인지하지 않는다면요?


저 존재가 마치 조각상처럼 나에게 무관심한 사물이 된다면요? 



저 존재가 힘의 관계에서 사라져버리면 남는 건 오직 내가 되겠죠. 그리고 나는 저 존재에 가해지는 고통에 흥분했던 나 자신과 오롯이 마주하게 될 거예요.



언뜻 고문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바타나쟌쿠르의 작품이 강렬하게 두려운 이유예요. 



작가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극단적 피로와 고통 그리고 상업적 “캔디 컬러” (B급 포르노 컬러이기도 하죠)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우선 붙잡아요. 보는 사람은 작가의 입에 들이부어지는 물, 벌린 양팔에 얹히는 무거운 물건, 나체처럼 보이는 리오타르 차림으로 거꾸로 매달린 몸을 보며 메스꺼움과 불편한 흥분을 동시에 느끼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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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자』(The Pendulum), 스틸컷, 2023 (이미지 출처: 카위타 바타나쟌쿠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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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 Ⅱ』(The Scale Ⅱ), 스틸컷, 2015 (이미지 출처: 카위타 바타나쟌쿠르 홈페이지)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바타나쟌쿠르가 그와 우리 사이의 힘의 관계를 사라지게 할 듯 말 듯한다는 거예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작가는 눈을 감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아요. 몸이 버티지 못할 때까지 가해지는 폭력에 그의 얼굴은 일그러질 때도 있고, 그 충격을 흡수해 내느라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기도 해요. 고문 포르노에서 줌 인(zoom in)되는 피고문자의 몸처럼.


작가가 작품에서 그리는 폭력은 들숨과 날숨을 거듭하는 명상처럼 반복적이예요. 같은 모양의 폭력이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작가는 마치 돌처럼 평정을 유지하죠. 강한 망치질이 돌을 쪼갤 수 있듯 강렬한 고통이 그의 몸을 뒤틀리게 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고통에 반응하지 않으려 해요. “사물”이 되는 거예요. 

바타나쟌쿠르의 몸이 고통과 무관한 사물이 될 때 그와 나 사이의 힘의 관계는 사라져요. 그 몸에 가해졌던 폭력과 그 폭력을 바라보는/즐기는 나만 남게 되겠죠.  

바타나쟌쿠르가 그리는 폭력은 여러가지예요. 희뿌옇게, 때로는 시꺼멓게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몸, 패스트패션 산업에서 착취당하면서 유독한 부산물에 중독되는 노동자의 몸, 지겹게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그 노동의 도구가 되는 여성의 몸, 인공지능의 도구 혹은 일부가 되는 인간의 몸. 모든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몸에 폭력을 선명하게 통과시키면서 보는 사람을 거듭 힘의 관계 안으로 유혹해요. 

때로는 그 관계의 관음증적 흥분을 허락하면서. 때로는 그 관계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폭력에 홀렸던 보는 사람만 남겨두면서. 그렇게 고통받는 몸과 고통의 모양을 비추는 사물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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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기계: 자기경제 속 노동』(Mental Machine: Labour in the Self Economy)
서오스트레일리아 아트 갤러리 (AGWA) 퍼포먼스 스틸, 2022 (이미지 출처: 카위타 바타나쟌쿠르 홈페이지)
 
바타나쟌쿠르가 속한 노바 컨템포러리(Nova Contemporary)는 그의 작품이 “인간의 능력과 여성의 인내력을 반증한다”고 소개해요. 역사적으로 시선을 던지기보다는 시선을 받고, 고통을 가하기보다는 고통을 받았던 여성의 몸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가 되죠. 바타나쟌쿠르 자신도 태국에서 자라면서 보아왔던 어머니, 가사도우미의 노동과 ‘조용한’ 여성이 이상적인 여성이란 가부장제적 선입견에 기민하게 반응해 왔다고 하고요. 

하지만 그건 연약하고 수동적으로 보이는 여성의 몸이 폭력 앞에 얼마나 끈질기고 강인한지 보여주기 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타나쟌쿠르가 가리키고 싶은 건 고통을 버텨내는 여성 작가의 강인한 몸보다는 그 몸을 ‘고통 받는 몸’으로 만드는 힘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관객(우리가 되겠죠)이 아닐까요.


바타나쟌쿠르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ć)이 『리듬0』(Rhythm 0, 1974)에서 자기 몸을 철저히 사물화했던 데에 충격 섞인 감명을 받고 인간의 몸, 여성의 몸을 퍼포먼스의 도구로 쓰는 데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이 ‘악명 높은’ 퍼포먼스에서 아브라모빅은 무려 6시간 동안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이 가하는 신체적 폭력과 그에 따른 심리적 피로와 공포에 노출시켰죠. 눈을 감은 바타나쟌쿠르처럼 퍼포먼스 내내 아브라모빅은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빨간 액체에 잠긴 바타나쟌쿠르의 가슴이 공포스러운 숨막힘으로 미세하게 떨리듯, 무표정한 아브라모빅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흘러요. 아브라모빅을 둘러싼 관객들은 여유롭게 작가의 몸에 쓸 도구를 고르고 있고요. 같은 관객들이 6시간 후 힘의 관계가 종료되었을 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아브라모빅을 마주하지 못하고 도망갔다고 하죠. 

내가 다른 존재에 가하고 지속했던 폭력과 마주한 순간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요. 

바타나쟌쿠르의 퍼포먼스가 “인간의 능력을 반증”한다면, 그건 보는 사람의 폭력을 비출 수 있는 사물, 곧 거울이 되는 고된 “명상”의 과정을 수행해 내기 때문일 거예요. 작가가 거울이 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 발현되는 힘은 바타나쟌쿠르의 퍼포먼스를 보며 느꼈던 불편한 자극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관객 그리고 아브라모빅으로부터 줄행랑쳤던 참여자들이 반증해요.


피를 서늘하게 하는 『리듬0』 퍼포먼스 사진들 중 조금 다른 하나가 있어요. 옷이 벗겨지고 칼에 베인 아브라모빅의 눈물을 닦아주는 관객 참여자예요. 다른 참여자들이 힘의 관계를 즐길 때, 이 참여자는 철저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그 관계의 무서움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관계에서 걸어나온 것 까진 아닐 수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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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아브라모빅의 『리듬 0』 퍼포먼스 중 작가의 눈물을 닦아준 관객 참여자 (photo by Donatelli Sbarra)

작가를 ‘고통 받는 몸’이 아닌 ‘내 앞에 선 사람’으로 보았던 이 참여자는 작가의 “명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작가가 거울이 아닌 사람이란 메시지를 건네기에 “명상”을 흩뜨렸을까요?


아니면 작가의 몸이 그런 “명상”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이란 희망의 지표일까요?
 


글ㆍ사진_김나영 (에디터)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사와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러풀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 바다 건너 남이 사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사실 별 거고, 우리와 내가 사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게 좋다. 소소한 책과 그림 이야기를 한다.
웹사이트: prismaticreader.com 인스타그램: @nayoung.nai.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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