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맥시멀리스트가 더듬는 희망의 감촉, 파라 알 카시미 (Farah Al Qas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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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미니멀리즘 대 맥시멀리즘”
인테리어 데코레이션에서 영원히 결판 나지 않을 대결 구도입니다.
8년 간 강경한 맥시멀리스트였던 저는 이제 미니멀리즘을 한 두 방울 정도 받아들이는, 타협하는 맥시멀리스트가 되었는데요. 그래도 맥시멀리스트 정신에 가차없이 투철한 공간을 보면 여전히 맥박이 빨라져요.
(이미지 출처: Noz Design by Noz Nozawa)
알 카시미는 자신이 “층(layer)”과 “창문(window)”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인터넷에 갑자기 노출된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인터넷은 외부와 연결하는 창문이면서 자신을 주변과 단절시키는 블랙홀(blackhole)이기도 하죠.” 앨리스가 떨어졌던 토끼굴(rabbit hole한번 탐닉하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과 비슷하지만 이상한 나라(wonderland)에 넘쳐났던 생생한 촉각과 시각, 후각은 매끈한 유리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블랙홀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진짜 케이크보다 언제나 더 맛있게 보이는 인스타그램 피드 속 케이크는 보고 또 봐도 배와 눈의 욕구를 완전히 채워주지 못하죠. 세밀한 레이스 커튼과 “메스껍도록 달디단” 핫핑크 이불, 시선을 빨아들이는 호피 무늬 사진은 양껏 즐기고 나서 휴대폰 화면을 끄면 왠지 허무하잖아요. 알 카시미는 거울, 액자, 휴대폰 화면과 같은 “창문”들을 능수능란하게 겹쳐 “층”을 만들면서 깊이와 너비를 알 수 없는 인터넷 토끼굴의 매력/마력을 환기해요. 그 매끄러운 이미지들이 눈의 미각을 얼마나 중독시키는지, 그때 내가 에어컨 바람이 얼리다시피 한, 사막 도시의 아파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쉽게 잊게 되는지.
그런데 여기서 흥미롭게 삐딱한 지점이 하나 있어요.
알 카시미의 작업이 디지털 문화의 양면성(“감각은 즐겁지만 허무해”)을 드러내는 여느 작품들과 달리 계속 아른거리는 이유예요.
알 카시미가 현란한 눈속임 스티커(트롱프뢰유trompe-l'oeil) 같은 삶의 공간과 그 공간을 다시 교란하는 디지털 문화가 자신이 기억하고, 느끼고, 회의하고, 사랑하는 아랍 에미리트의 ‘평범한’ 일상이라는 사실을 긍정한다는 점이예요.
“보는 사람이 [작품에 드러난] 지리적 위치 너머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심도 깊은 아이디어를 설명해 주는 건 제 몫이 아니예요.” 아랍 에미리트를 번쩍번쩍한 두바이 빌딩, 오일 머니(oil money), 영화에 나오는 사막, 이슬람 보수주의 따위의 익숙한 표지로 치환하는 경향에 대해 알 카시미가 던진 대답이예요. “제가 의도한 관객들(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 작품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 바로 이해할 거예요.”
알 카시미는 사막 한 가운데에 놓인 휘황찬란한 쇼핑몰로 압축되는 페르시아 만의 소비주의와 디지털 문화 밖에 서서 눈살을 찌푸리지도, 그것이 아랍 에미리트의 특이할 것 없는 일상이라는 사실에 덮어놓고 부끄러움을 드러내지도 않아요. 이 공간 밖의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아랍 에미리트’란 객관화를 떨쳐 버리지 못한다면 알 카시미의 작품은 ‘디지털 문화 비판 아트, 두바이 에디션’ 정도에 그치겠죠.
하지만 알 카시미가 자신과 자신이 의도한 관객들의 삶의 단면에 보내는 애정과 공감을 탐지한다면, 나른한 강박이 감도는 듯 보였던 그의 맥시멀리즘적 공간에서 뜻밖에도 어떤 희망의 더듬거림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검은 유머로 감춰진 듯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희망의 감촉. 알 카시미가 바다 건너 관객이 느끼도록 하고 싶었던 건 그런 감촉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