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어서 안 죄송합니다,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Njideka Akunyili Cro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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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로코 좋아하는 사람’과 ‘정치, 역사 다큐멘터리 좋아하는 사람’하면 대강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전자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사람, 현실에 없는 말랑말랑한 해피엔딩에 목매는 사람, 사유는 좀 덜 하는 사람.
후자는 사회 속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 폭력과 정의라는 현실의 양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 늘 사유하는 사람.
삶의 거친 단면을 그대로 보려는 ‘다큐멘터리 파’에게 사랑이나 낭만은 그저 달콤한 환상이거나 지배층이 지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제인 경우가 많아요. 보통 ‘낭만은 지배 기제’라는 목소리가 큰 것 같네요.
틀렸습니다.
“난 낭만주의자예요!” 미국에서 활동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Njideka Akunyili Crosby)는 여러 번 말합니다.
아쿠닐리 크로스비는 나이지리아의 소도시 에누구(Enugu), 수도인 라고스(Lagos), 그리고 다시 미국 필라델피아, 캘리포니아를 집이라 부르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기억 속에, 몸에 새겨진 집의 흔적들이 가득합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어떤 사람 혹은 사람들이 서아프리카의 화사한 색채를 드문 드문 품은 거실이나 침실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여요. 하지만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록, 이 차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장면이 그간 작가가 거쳐왔던 공간들, 아름답거나 끔찍했던 역사적 사건들, 그 시절의 자신을 만들었던 팝 문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아우성으로 떨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죠. 나이지리아 군부 정권 수장의 얼굴, 반 정부 인사들이 처형되었던 해변, 마른 생선 냄새가 가득했던 장터, 첫 영성체 날 여동생의 모습, 90년대에 유행했던 나이지리아 팝 가수의 앨범 자켓, 패션 잡지 이미지들, 그리고 이 기억들이 대서양 반대편 미국에서, ‘아프리카 흑인 이민자’라는 표지를 달고 환기되었을 때의 긴장.
(위, 아래) 『누완틴티』(Nwantinti), 2012; 확대 뷰 (이미지 출처: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 웹사이트)
집이란 공간에 대한 기억의 주파수들이 엉기는 위 작품에 등장하는 커플은 아쿠닐리 크로스비 본인과 그의 미국 텍사스 출신 백인 배우자인 저스틴 크로스비(Justin Crosby)입니다. 두 사람만의 공간인 침실에서 나직하고도 전형적인 사랑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죠. 낭만적이예요.
그렇지만 이 낭만적 장면에는 ‘사회’나 ‘역사’가 탈색되어 있지 않아요. 두 사람의 사랑이 보존되는 침실, 침대 커버, 심지어 저스틴의 몸에도 아쿠닐리 크로스비가 거쳐온 공간과 시간이 새겨져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두 사람의 사랑과 그 사랑 주위에서 진동하는 역사의 소리 중 아쿠닐리 크로스비를 움직이는 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이 틀렸습니다.
작가가 거쳐 온 공간들과 그 공간의 역사가 없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이토록 진솔할 수 없고, 그 사랑이 없다면 과거의 공간에 대한 작가의 기억은 처참한 폭력을 박제한 기록일 뿐이기 때문이예요. 여느 신데렐라가 여느 왕자님을 만나 해피엔딩에 이르는 도식적 이야기처럼 역사를 지운 사랑은 언제든 복제되고 납작하게 재생산될 수 있어요. ‘여느’ 신데렐라와 ‘여느’ 왕자님이어도 되니까 반드시 이 두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죠.
그렇다면 반대로 사랑 없이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는 건 어떨까요? 이를테면 자신과 다른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잔혹함을 기둥으로 삼는 제국주의, 노예제, 인종주의의 역사를 되짚을 때. 그 과정은 아마도 정당하지만 고단한 분노, 고통, 상실감, 그리고 트라우마로 움직일 거예요. 그 분노는 차별과 억압의 기억을 ‘피부색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어물쩍 넘기려는 제스처에 대한 당연한 불신과 2차적 분노를 야기할 테고요. 이런 불편함을 안은 어떤 비평가는 말합니다. “[사랑과 폭력적 만남의 역사를 ‘포개는’ (layer) 크로스비의 이미지들은] 사랑의 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힘이 존재하던, 하지 않던.”
아쿠닐리 크로스비는 역사가 삭제된 사랑과 사랑이 배제된 역사, 이 두 칼날이 각각 어떤 상처를 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두 상처를 함께 어루만집니다. 언뜻 상투적이고 시간 너머에 있는 듯한 사랑의 몸짓에 작가가 거쳐 간 공간에서 들려오는 역사의 두런거림을 집어넣으면서요.
『내 사랑 다시 쓰기』 (Re-Branding My Love), 2011 (이미지 출처: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 웹사이트)
연인의 등에 입 맞추는 몸짓은 고요해요. 시간의 흐름, 공간의 닳음, 걱정, 분노, 향수, 그 모든 것이 멈춘 듯 하고요. 사랑을 주고받는 연인의 침실을 흔히 일상의 시공간이 침범할 수 없는 소우주(microcosmos)라 부르는 것도 이런 까닭이겠죠. 하지만 크로스비 커플의 침실, 그리고 이들의 몸에는 과거의 공간에 대한 기억, 그 기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현재, 그리고 그 의미가 다시금 해체되고 새롭게 만들어질 미래의 자취가 끊임없이 스며들어요. 의식 저편의 기억을 지금 이 순간 눈 앞으로 꺼내오듯, 작가는 그간 머물렀던 여러 집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오랜 시간을 들여 종이에 전사(transfer)합니다. 그리고 조금 바랜 듯한 기억의 빛깔처럼 막 전사된 이미지에 백색 도료를 발라 그 강렬한 색채와 윤곽을 차분하고 반투명하게 만드는 작업을 또 수행해요. 무수한 이미지들을 침실에, 몸에 하나씩 입혀갈 때마다 ‘시공간 밖에 있는 낭만적 소우주’는 조금씩 허물어지죠.
언제나 새로운 기억이 침투할 수 있고, 기존의 기억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기에 두 연인이 만드는 공간은 늘 변화해요. 그리고 변화할 것이란 사실을 두 사람이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단단하게 느껴지고요. ‘신데렐라와 왕자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못박는 해피엔딩에서 눈 밑이 떨리는 듯한 불안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들의 완벽한 사랑에 언제든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반대로 크로스비 커플의 사랑은 바다 반대편에서 살며 각자 쌓아온 기억들, 이민자 흑인과 미국인 백인 연인이란 사실에 딸려 오는 인종주의 역사의 무게, 도식적 해피엔딩에 대한 경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않는 사랑에 대한 믿음, 그 모든 걸 받아들이면서 한 겹씩 더해가기에 변화가 두렵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역사의 쓰라림을 피부로 느끼며 어루만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 쓰라림에 절망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어요. 분노와 트라우마를 대신할 수 있는 동력.
크로스비 커플의 침실과 사랑을 동적으로 만드는 기억 조각들은 작품을 옮겨 다니며 매번 새로운 의미를 얻어요. 작가의 오늘과 내일이 쌓일수록 그 조각들은 계속 늘어나고 그들이 만들 변화의 가능성도 함께 늘어가겠죠. 그리고 그 변화를 아로새기며 진화해 갈 사랑도 아마 계속될 거예요.
“이 소설에서 나는 신중한 이성으로 조심스럽게 감췄지만 여전히 굳건한 내 자신의 낭만주의를 엿보았습니다...이 생기 넘치는 러브 스토리에는 결코 스러지지 않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날 것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나이지리아 출신 이민 작가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예(Chimamanda Ngozi Adichie)가 아쿠닐리 크로스비처럼 나이지리아와 미국을 오가는 주인공이 사랑의 ‘해피엔딩’을 맞는 자신의 소설 『아메리카나』(Americanah)의 서문에 쓴 말입니다. 두 작가는 공간에 아로새겨진 역사와 기억의 찬란함과 아픔, 그리고 기억과 함께 움직이며 쌓이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공유해요. 때로는 기억의 끊임없는 아우성이 벅찰 수도 있을 크로스비의 공간 한 켠에서 두 연인의 모습, 그리고 그런 낭만의 힘을 믿는 아디치예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닐거라 믿어요.
(위에서 아래) 『이전 존재들』 (Predecessors), 2013;
왼쪽 패널, 크로스비 커플의 결혼 사진이 입혀진 부분 확대 샷;
오른쪽 패널, 아디치예의 사진이 입혀진 부분 확대샷, 아디치예 이미지 원본
(이미지 출처: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 웹사이트, British Council: Liter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