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불꽃을 향하여: 노들린 피에르(Naudline Pie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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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루를 살면서 ‘초월’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뜨거움’은요?
아플 정도의 ‘내밀함’은 어떤가요?
우리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화면만 스크롤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침실 안 이불 커버가 어떤 무늬인지도 알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아마 모르는 존재와의 관계가 이만큼 내밀했던 때는 없었지 싶어요.
하지만 이건 만질 수 없는 내밀함이고, 그래서 차가운 내밀함이예요. 매끄러운 화면 아래에 갇힌, 재현된 내밀함이요.
서로 다른 무엇이 만나서 상대방과 비비면 마찰이 생기고, 그 마찰에서 열이 발생해요. 뜨거운 공기로 시작한 열은 오르고 올라 눈에 보이는 불꽃을 만들어 내죠. 불꽃은 나와 다른 무엇과의 거리가 사라졌을 때, 그 존재의 온기가 내 몸에 따끔하면서 뜨거운 변화를 만들어 낼 때 생겨요. 그래서 불꽃은 일상의 미온한 상태를 초월한 나의 흔적이면서 지금 나와 만난 다른 존재의 몸의 열기도 담고 있죠.
화면 아래 존재를 아무리 더듬어도 일어날 수 없는 종류의 불꽃.
작가 노들린 피에르(Naudline Pierre)는 바로 이런 불꽃을 그려내요. 그리고 그에 휩싸이고자 해요. 아프고, 어질어질하지만 더없이 충만한 내밀함에 닿으려 하거든요. 피에르는 미적지근하다 못해 식어버린, 이 정신없는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서 다른 존재와 세계의 뜨거움을 몸으로 느끼고 싶어해요. 불꽃을 일으키려면 살이 피로한 고통을 겪을 것도, 그 열기에 데일 것도 알지만, 그 경험이 기쁨이란 말랑한 단어가 채 담지 못하는 황홀함(ecstasy)을 가져다줄 거란 것도 알기 때문이에요.
날개를 단 형상들은 무표정하게 너그럽거나 중립적인 표정을 머금고, 그들 가운데에는 종종 가냘프게 서 있거나 안겨 있는 사람의 형상이 있어요. 이들의 몸은 거의 빈틈없이 맞닿거나 엉겨서 그들을 둘러싼 불꽃만큼이나 뜨거운 공간을 만들어내고요.
불꽃에 휩싸인 날개 달린 형상은 성 테레사를 격정에 휩싸이게 한 신성한 불꽃이나 불의 천사 세라핌을 떠올리게 해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세라핌은 신을 뜨겁게 찬미하는 존재죠. “불타는 존재” 혹은 “불로 삼키는”이란 뜻을 지닌 세라핌은 어떤 절대적인 내밀함(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경험일 거예요)을 문자 그대로 몸을 불태우며 겪고 드러내요.
아이티 계 미국 작가 피에르는 목사인 아버지의 종교적 언어와 이 다음에 올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짙게 배인 집에서 자랐어요. 그렇기에 손바닥 안 화면 사이즈로 줄어든 이 세상 너머에 전혀 다른 뜨거운 세상이 있다는 점이나 거기에 가 닿고자 하는 열망은 피에르에게 매우 익숙했죠. 그러니 이 열렬한 기대가 피에르의 작품 세계에 때로는 날개 단 세라핌의 형상으로, 때로는 종교적 삼면화(triptych) 형태로 피어오르는 건 당연할지 몰라요.
『신성한 사랑의 불멸하는 깊이』, 2019 (이미지 출처: 노들린 피에르 웹사이트)
그렇다고 피에르가 단지 기독교적 초월을 꿈꾸는 건 아니예요.
이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을 그려보려면 나를 일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치열한 상상이 필요해요. 신이란 저 너머의 존재를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종교의 언어는 자연스럽게 그 상상에 강력한 잉걸이 되죠. 하지만 피에르의 작품이 꿈꾸고 그려내는 초월은 이 종교 언어의 이글거리는 힘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특수한 범주의 초월을 넘어서요.
그래서 피에르는 자신이 그리는 초월을 “자유”라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너르다’는 말에 거듭 끌려요.…무언가를 늘리고, 자라게 하고, 줄이고, 조금씩 드러내고 싶거든요. 재조립하는 거죠. 이 모든 건, 자유, 한 단어로 압축되고요.” 피에르가 말하는 “자유”는 재현 대상과 질료를 “재조립”하는 창작 과정의 자유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그 대상과 질료가 될 것인지 선택하는 자유이기도 해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 ‘무엇’은 내가 반응하는 가치와 두려움과 열망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불씨는 다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떻게 존재하고 싶은지 묻습니다.
피에르에게 자유는 그가 원하는 대로 존재할 자유이고, 그 자유는 그가 원하는 모든 통로의 초월을 포함해요. 그것이 기독교 신의 세계에 접속하는 것이든, 현세를 스쳐 지나가는 어떤 환상적 존재와 만나는 것이든 말이예요.
그렇기에 피에르의 작품 속 불꽃의 힘과 생기가 오롯이 느껴지는 건 피에르의 초월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헤칠 때보다는 그 초월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따라갈 때예요.
피에르는 그가 향하는 장소와 대상에 가 닿기 위해 접촉(touch)을 활용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대상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 대상이 실재한다는 믿음이 가장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닿으려는 대상이 이미 여기 있다는 믿음이요.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단지 그 대상의 윤곽을 어루만지고 어루만져서 대상이 캔버스에 현현하도록 하는 거예요. “내밀함(intimacy)은 내 작품 세계의 전부”라고 피에르는 말합니다. 그리고 ‘접촉’은 그 내밀함을 빚어내는 기제가 되고요. 피에르가 ‘캐릭터’라고 부르는, 캔버스를 채우는 형상 하나하나와 몸을 맞대고 이들을 쓰다듬으며 작가는 연기 같은 상상을 따뜻한 살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요.
갈망하는 대상 혹은 장소로 초월하는 접촉의 과정은 피에르가 캔버스를 채우는 방식과도 닮아 있어요. 오일 페인트 특유의 반투명한 층을 만들어내는, 거듭되고 섬세한 붓질이 형상을 어루만지며 그들과 가까워지는 과정과 조응하니까요. 붓질을 할 때마다 보이지 않았던 형상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면서 현현해요. 피에르는 이를 두고 형상들을 “층층이 거듭 느끼는 것”이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