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의 사진소묘]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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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pixabay.com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길이다
정상 부근에 다다르니 오솔길이 펼쳐졌다. 낙엽이 쌓여서 길이 보이지 않는 구간도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푸른 솔잎 곁에 붙어 있었던 죽은 솔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참 동안 소나무 군락 속에 서있었다. 손가락 길이만한 누런 죽은 솔잎이 머리에 꽂이기도 했고 눈을 따갑게도 했다. 시퍼런 솔잎과 누런 솔잎의 공존인가, 경계인가, 윤기 있는 젊음과 사멸해 가는 늙음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묘사한 김훈의 단편 <화장>이 떠오른 건 왜 일까?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함민복의 시 구절이 가슴에 내리 꽂힌 것은 왜 일까?
가을 소나무 군락 속에서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은 단편이며 시가 떠오른 건 분명 뜻밖이다. 그만큼 나는 무작정 길을 걷다 뜻하지 않은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런 호사는 혹 나만의 길 걷기가 주는 즐거움은 아닐까?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道行之而成, 장자, 제물론齊物論)
(道行之而成, 장자, 제물론齊物論)
서판교 운중천에서 낙생대공원, 서현역, 분당천, 수내동 샛별마을에 이르는 길은 나있든, 나 있지 않은 길이든, 사람들이 잘 걷지 않는 길이든 내가 걸었기에 길이다. 동네 길, 무작정 걸으면 그것이 둘레길이고 숲길이고 올레길이다.
모든 길이 다 그렇다.
모든 길이 다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