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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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김수영!
나만의 스타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김수영의 시는 언제나 현재
사람 숲을 이루는 서현역 광장에서 문득 내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순간 ‘나’와 ‘그’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단순 교환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 다리가 풀리고 현기증이 입니다.
나는 나만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 누구도 살아보지 않았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삶 말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 속에서 그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여러 삶을 들여다보고 대충 나에게 맞는 것을 골라 마치 내 삶인 양 살아왔던 것입니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런 삶을 아주 경계했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나를 경멸했을 겁니다. 그는 ‘나’를 상품과는 달리 교환 불가능한 단독성의 개념으로 파악했습니다. 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존귀한 개체로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스타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절한 싸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를 나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끊임없이 방해하는 외적인 것과 깨어 있지 못하는 자신과의 싸움!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김수영 시인은 평생 그 싸움을 한 사람입니다. 싸움은 그에게 차라리 숙명이었습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 중략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 정말 얼마큼 작으냐…”(<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부분)
인용한 시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시는 나만의 삶을 방해하는 내외적인 것과의 투쟁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를 흔히 자유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에 있을 겁니다.
이런 자유에의 의지를 일관되게 노래했던 김수영 시인은 철학자 강신주 씨 표현대로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의 시는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래도 될 정도로 우리는 준비 되어 있는 걸까요?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김수영 시인의 시를 애타고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굿바이, 김수영? 하이!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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